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쉽게 씨워진 시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쿄 아사쿠사의 광대,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자화상

릴케의 천사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다

특집을 기획하며 ①시장 속의 문학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③미래에 관한 회상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빨간 장미 한 송이

최후의 북촌 구식 현모양처이자 최초의 자유 신여성

시인이 안 됐으마 제비가 됐을 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평양에 갔을 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진 ‘바다의 땅’, 통영

문인들의 ‘목뽑기’ 풍경 셋

정의론의 방법에 대한 질문

①진한 노을,초봄 개울에서 ②기러기떼 헛 가위질하듯,한네의 승천

①동전처럼 ② 오샤와 Oshawa

사물놀이

첫 번째|뒤늦게 눈뜬 재능 두 번째|혼자 있는 시간의 고요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네 번째|매미 오줌 맞기

①제25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②우리 문단에 당도한 새로운 감수성

유미리의 한국어

사실의 기록보다 더 무심한 영화, ‘전장’을 온전히 드러내다

소설의 귀환과 그늘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옮기기

추리와 역사 사이에서

이 세상은 꿈, 꿈이야말로 진실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2017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글밭단상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글 손택수 ㅣ 시인. 1970년생
시집 『호랑이 발자국』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등


합포 산호동 옛집


임화의 바다는 늘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바다는 빛나는 별과 폐허 사이에서, 아름다운 실내의 전설과 역사적 시간 사이에서 끝없이 오르내리는 물결에 휩싸여 있다. 그 물결이 직선적인 시간의 수평선 속에 갇힌 바다를 영원히 푸르게 한다면 어떨까? 시인을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으로 있게 한다면 어떨까? 이 바다의 높은 물결은 그러니 고통이면서 동시에 사랑이다.


임화가 카프 해산계를 내고 결핵 치유를 위해 내려 가 있던 곳이 마산 합포 쪽이다. 합포는 시집 『현해탄』 의 무대이기도 하고, 두 번째 반려자인 소설가 지하련 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합포에 머물던 몇 해는 십대 가출 이후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했던 시인 이 모처럼 불안한 평온 속에서나마 창작에 좀 더 집중 을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마치 근대 문인들의 비극적 운명을 흉내라도 내듯이 곧 쓰러질 듯한 포즈로 그 근방의 결핵요양소 부근에 방을 얻어 습작을 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해당화 가 좋던 가포였던가. 나는 정말 요양소를 거쳐 간 숱한 문인들처럼 결핵이라도 앓고 싶었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 비장했던 젊은 날의 초상에 슬며시 얼굴이 달 아오르기도 하지만 그것이 풋풋했던 문청 시절의 한 모 습임을 애써 부정할 수 없다.
그때 이 지역 사람들에게 떠도는 임화와 지하련의 이 야기를 들었다. 소설가 지하련의 두 번째 오라비인 이 상조의 산호동 산 번지를 직접 찾아보고 온 한 지역문 학 연구자의 이야기는 내게 각별한 느낌을 주었다. 그 는 특유의 갯내를 뿜어내는 사투리로 일본 유학 시절 의 임화와 지하련의 오라비 간에 있었을 법한 교류를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지하련은 혼전임신을 한 채 큰 오라비인 이상만에게 임화와의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다가 거절당한 뒤 산호리 집에서 임화 의 병간호를 하며 머물렀다고 한다. 이혼남에 폐병장이 사내를 간호하는 지하련의 이미지는 어 떤 비극성과 낭만성을 띤 채 한 가난한 문청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세상이 소란해 서 맘 둘 곳 없는데 너는 앓고 아이들은 가엽고…… 나는 고달프고 쓸쓸타.” 간호를 하다가 감 염된 지하련에게 쓴 임화의 편지는 그 시절 그들의 문학이 어떤 고통 속에서 꽃피었나를 짐작케 한다.
나는 임화와 지하련이 거닐었을 법한 골목길을 따라 자주 산책을 가곤 하였다. 지금은 매립 이 되었지만 수더분하게 흘러내린 산자락 부근까지 예전엔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아마도 그 바 닷물이 『현해탄』의 페이지 페이지를 적셨을 것이고, 병간호를 하면서도 소설 습작에 여념이 없 었을 지하련의 지친 영혼을 위무하여 주었을 것이다. 그 끝에 지하련의 집이 있었다. 2층 거실 에 벽난로까지 갖춘 1930년대 목조가옥으로 노구에 다소 피로해보였지만 외관에선 단호한 결 기 같은 것이 느껴지는 단단한 집이었다. 그 집 현관 앞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청 매 한 그루가 있었다. 주인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백년은 된 고매라고 했다. 매화는 그 긴 시간의 풍상 속에서도 맑고 서늘한 기운으로 우뚝해 보였다. 아마도 임화도 이 매화나무를 바라보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매화향 속에서 나는 그가 노래한 바다를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 새벽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출 때, / 현해탄의 물결은 / 우리들이 어려서 / 고기떼를 쫓던 실내(川)처럼 / 그대들의 일생을 /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 「현해탄」 중

임화의 바다는 늘 현재 진행형이다. 그의 바다는 빛나는 별과 폐허 사이에서, 아름다운 실내 의 전설과 역사적 시간 사이에서 끝없이 오르내리는 물결에 휩싸여 있다. 그 물결이 직선적인 시간의 수평선 속에 갇힌 바다를 영원히 푸르게 한다면 어떨까? 시인을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으로 있게 한다면 어떨까? 이 바다의 높은 물결은 그러니 고통이면서 동시에 사랑이다. 합포에 머물던 몇 해는 내게도 임화의 편지 구절처럼 ‘고달프고 쓸쓸’키만 했다. 이십대 중반 지역 대학의 야간수위를 하면서 시를 쓰던 청년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으랴. 그래도 불우하였으 나 아름다웠던 선배 문인들의 삶을 엿보면서 견딘 그 시절이 내게도 청매향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이태 전 산호동 567번지가 불에 탔다고 한다. 다행히 전소는 아니라고 하나, 참혹하다. 그 흔 한 비석 하나, 안내문 하나 세워두지 않은 그곳. 청매는 무사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