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쉽게 씨워진 시

“살아있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쿄 아사쿠사의 광대,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자화상

릴케의 천사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다

특집을 기획하며 ①시장 속의 문학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③미래에 관한 회상 ④살아남기 위한 자들의 언어

빨간 장미 한 송이

최후의 북촌 구식 현모양처이자 최초의 자유 신여성

시인이 안 됐으마 제비가 됐을 꺼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었던 「천체수업」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평양에 갔을 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조선의 천재’ 허균의 『성소부부고』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진 ‘바다의 땅’, 통영

문인들의 ‘목뽑기’ 풍경 셋

정의론의 방법에 대한 질문

①진한 노을,초봄 개울에서 ②기러기떼 헛 가위질하듯,한네의 승천

①동전처럼 ② 오샤와 Oshawa

사물놀이

첫 번째|뒤늦게 눈뜬 재능 두 번째|혼자 있는 시간의 고요 세 번째|합포 산호동 옛집 네 번째|매미 오줌 맞기

①제25회 대산문학상 시·소설 부문 본심 대상작 선정 ②우리 문단에 당도한 새로운 감수성

유미리의 한국어

사실의 기록보다 더 무심한 영화, ‘전장’을 온전히 드러내다

소설의 귀환과 그늘

여백을 어루만지고 퇴고하다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옮기기

추리와 역사 사이에서

이 세상은 꿈, 꿈이야말로 진실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

2017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등

기획특집

②“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다매체 시대의 문학

글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 ㅣ 작가, 정신분석학자, 파리7대학 명예교수. 1941년 불가리아 출생.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신분석학 및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소설가로 2015년 레종도뇌르상, 2011년 공로훈장, 2008년 바츨라프하벨상, 2006년 한나아렌트상 등 다수의 국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 『시적 언어의 혁명 La Révolution du langage poétique. L’avant-garde à la fin du XIXe siècle, Lautréamont et Mallarmé』(1974) 『공포의 권력 Pouvoirs de l’horreur. Essai sur l’abjection』(1980) 『검은 태양 Soleil noir. Dépression et mélancolie』(1989) 『위대한 여성: 한나 아렌트, 멜라니 클라인, 콜레트 트릴로지 Le Féminin et le sacré』(카트린 클레망 공동집필, 1998), 『순수 예술로서의 결혼 Du mariage considéré comme un des beaux-arts』(필립 솔레르스 공동집필, 2015) 등이 있다.

“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다매체 시대의 문학

시인은 이 ‘심금울리기’의 뿌리에 있으며, 보편성을
구현하는 파장을 지닌 자들입니다. 왜 시인인가요? 감각과
감수성을 조절하고, 명명하기 힘든 열정을 진찰하며
시인은 정체성, 국경, 단체들을 가로질러 타자들과 함께
현존할 수 있게 합니다. 다시 말해, 시인의 시적 언어가
빚어내는 연금술은 현 시대에 부족한 박애정신과 분리될
수 없는 안감과도 같습니다.



저는 다매체 시대의 문학이 제시하는 여러 양상 가운데서 모든 문학의 근원인 시에 중 점을 두고 말해보려 합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디지털혁명이 한창이며, 소비적이고 기술화 되고 자본화된 사회의 영향을 받는 가치들은 심각한 위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독일의 시인인 횔덜린은 19세기 초에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비탄의 시대에 시인들이 무슨 소 용이 있는가?” 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GAFAM)시대에 맞서 그 리고 종교전쟁이라는 허울을 넘어서 믿음과 인간적 관계에 관한 인류학적 문제를 제기하 는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에 맞서 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시인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말하기’의 문화, 즉 ‘어떻게 말 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소통’은 ‘언어의 요소들’로, ‘스토리텔링’이나 셀카로, 또 편리한 글로비시(역주 : 단순화된 영어)나 ‘말하기’가 축약된 이모티콘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우수에 잠긴 횔덜린의 질문은 1800년의 일입니다. 그 질문은 프랑스대혁명의 계몽주의가 공포정치 로 소멸되는 모습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환멸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횔덜린은 역사에 실망한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에게 말합 니다. 역사적 정신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정신이 무너지고, 초월성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놀 라우리만큼 간단한 표현으로 답을 합니다. “산다는 것은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다”(1804). ‘빵과 포도 주’란 시를 쓰고 3년이 지나 그는 시인들에게 무한한 임무를 지워줍니다. “시인들은 살아남은 것에 근 거를 세운다”(회상 Andenken, 1803). 시가 그리스 신들, 복음서적 도취, 코란의 쾌거를 대체한 것이 라고? 견디기 힘든 요구사항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소리들이 들려오는 겁니다. 왜 시인들인가? 무슨 소용이 있나?
더 근엄하고 반항적인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20세기에는 시를 쓸 수 없게 되었 음을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비탄(독일어로 Dürftiger는 궁핍, 불행, 빈곤을 말하나, 일반적으로는 비탄을 뜻한다)을 마주한 시 인들(Dichter). 이 단어는 신의 죽음에 관해서는 약해 보이고, 인류에 반하는 범죄 앞에서는 참을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관계와 가치가 절단된 이 새로운 국면에서, 나치 이후, 홀로코스트 이후, 여 전히 현재적인 이 질문은 새롭게 재개됩니다. 기업적 허무주의, 과도하게 접속된 문맹성, 강도 같은 이 슬람 근본주의, 죽음충동을 에로스화 하기, 그리고 예외적 상태의 민주주의…… 왜 시인들인가?…… 게다가 그곳이 진정한 그들의 자리인가, 그들의 소명인가?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러한 질문, 이런 불안 함이 나를 사로잡기에 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불가리아 출신으로 프랑스 국적 소유자이며 유럽의 시민이자 미국 시민이기도 하고,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국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프랑스 소설과 시를 통해 프랑스어를 배웠습니다. 글쓰 기의 오랜 여정이 저를 형성해주었고 이 여정 중 제가 머물렀던 곳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싶지 만 오늘은 두 시인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했던 파울 첼란(Paul Celan)은 “견디자, 항상 벌어진 상처의 그늘에서” 라고 했 고, 저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여성작가인 콜레트(Colette)는, 새로운 시작이 열리는 시기의, 일종 의 새로운 탄생의 시기에 겪는 우울을 견뎌낼 줄 알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내겐 전혀 힘든 일이 아 니었다”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시인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음악가입니다. 목소리와 감각이 일치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낚아 챌 줄 알기 때문에 모국어를 감동으로 뒤흔들어 놓으며, 초기 스토아학자들이 ‘심금울리기’라고 말했 던 일에 뛰어납니다. 그리스어로는 ‘oikeiosis’라고 하는, 겉으로는 만져지지 않는 이 감각은 자신과 다른 이의 가장 깊은 곳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것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화해’라 했는데, 특히 스토아 학파들에 의해 ‘우리들의 사랑’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인류’와 ‘박애’라 불리게 될 것들의 첫 번째 밑 그림을 이렇게 구성하였습니다. 시인은 이 ‘심금울리기’의 뿌리에 있으며, 보편성을 구현하는 파장을 지닌 자들입니다. 왜 시인인가요? 감각과 감수성을 조절하고, 명명하기 힘든 열정을 진찰하며 시인은 정체성, 국경, 단체들을 가로질러 타자들과 함께 현존할 수 있게 합니다. 다시 말해, 시인의 시적 언어 가 빚어내는 연금술은 현 시대에 부족한 박애정신과 분리될 수 없는 안감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박애 정신이 이 포럼의 추진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무너질 때,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단지 시와 글쓰기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시인을 찾아 나서는 것은 필연적이며 불가피 합니다. 시인이 없다면 더 이상 나누어 가질 ‘심금울리기’가 없을 테고, 인류애라는 것도 더 이상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심금울리기’를 깊이 파고들어 그것을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하려면, 생산과 재생산에 할애하는 사회적 시간인 수직선 상의 시간에서 벗어난 고독이 필요합니다. 욕망과 폭력의 폭발, 관계와 헤어짐, 가해하고 되받는 파괴성, 겪어내고 피했던 죽음, 그리고 사회적 시간과 고독의 시간 사이에서, 시간 밖에서 시간으로, 자신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반발과 회복이 계속되는 이 여 행은 내가(시인이) 행동과 표현매체(말, 소리, 제스처, 이미지, 무대공간과 새로운 기술인데 모든 예술 가 안에는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자체에 ‘투자’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적 말하기를 지금 행해 야 가능한 것입니다.

모더니티의 화상(火傷)으로 우리를 데려갈 단어들에 대한 추억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봅시다. 방 금 사용한 ‘투자하다’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로 ‘kred’라고 하는데 서로 주고받은 선물을 의미합니 다. ‘사도신경’(credo “나는 믿습니다”)이란 라틴어나 재정적 ‘신용(credit)’ 대출이란 단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단어에서 선물, 상호성, 믿음이라는 의미만을 끄집어낸다면, 사랑의 그림자 속에서 도 피어나는 사랑 같은 것, 랭보가 “사랑의 열쇠(clé)”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알고 있 습니다. 아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줄 때, 자기가 누군가를 믿을 때만 질문을 퍼붓습니다. 그는 의 미, 죽음, 사랑을 열기 위해 ‘열쇠’를 찾고 그것들을 재발명합니다. 랭보는 “나는 나를 앞서간 모든 사 람들보다 유난히 공로가 있는 발명가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호적 ‘심금울리기’가 시작될 때 종교들보다 훨씬 먼저 나타난, 그 이후 종교는 그것을 찬미하거나 금지했지만, 종교보다 앞서고 정치보다 앞섰던 –조금 후에 이야기 하겠지만- 인류학적 신 뢰의 필요성에서 나타난 시적 ‘말하기’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제안합니다.
그러나 ‘심금을 울리는’ 음악가만이, 시인만이, 그의 매체와 대중매체들을 다양하게 해주며, 어떤 절 대적 의미나 최고권한에 기초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신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인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기만의’ “경이롭고 예기치 못한 박자”(랭보)를 가진 그 분야의 ‘발명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를 읽는 당신은 그와 더불어 발명가가 될 것입니다.
시인(넓은 의미로)의 고독은 종교인을 앞서고 넘어서는 ‘여행’이며, 이 여행을 통해서 확신이 드는 점 은, 살기 위해서는 ‘형태를 옹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말하는 자들의 특성인 이 ‘심금울리기’를 전달하여 혁신이 요구되는 과감함, 가치 있는 보편적인 자유 에만 시간을 할애하며, 예기치 못한 것과 경이로운 것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횔덜린의 인용문에서 멀어졌는데 그 글의 다성적 의미는 항상 저를 따라다닙니다. 두 세기 전 부터 시인(Poète)의 ‘왜(Pourquoi)’(두 글자의 P는 대문자)는 쓰는 행위(현대가 모든 예술에게 부여 한 총체적 의미로)의 ‘어떻게 Comment’에게 자리를 양보했다고 생각합니다. 감각의 교란인 ‘취한 배’ 나 의미와 무의미의 ‘일뤼미나시옹’처럼(역주: 랭보의 시집 제목들). 시적 글쓰기(écriture poétique)- 시(Poésie)가 아닌-는 우리에게 어떤 토대도 제공하지 않고 단지 새로운 토대를 만들어내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계몽주의와 인권의 토대도 그곳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적 글쓰기는 끝없이 새로워지는 내적 경험의 ‘복합우주(multivers)’(우주론자들이 말하듯)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인권의 효력 은 단독자들이 활짝 피어나는 데 있고, 시적 글쓰기란 종교들의 충돌을 넘어서 함께 나눌 수 있는 단 독자들의 언어가 아닐까요? 저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결국 그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시의 심리사회적 역동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현대가, 특히 디지털이 제안하는 수많은 형태들 안에서 시의 확산에 힘을 보태줍니다. 앞을 멀리보고 과감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한다면 인류미 래학은 인류가 통속화되고 자동화되는 과정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


시적 ‘복합우주-복합운문’(역주 : multivers 단어에서 vers는 ‘시’, ‘운문’의 뜻도 있다)의 활기찬 힘이 드러나는 예를 들어볼까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 힘은 우리 안에 있고 시인은 오늘날 확산된 글쓰기 를 통해 끊임없이 재발명을 합니다. 인터넷은 여러 다른 가능성을 찾아낼 줄 아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발명의 매체입니다. 그들은 노래, 음악, 강독, 공연 등을 혼합해서, 보르헤스가 꿈꿨던 것처럼, 하이퍼 텍스트를 다루며 소설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이러한 시적 탐구의 형태를 계속하기 위해 저는 정신 분석학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말했던, 인터넷과 인터넷 사용자들의 순진함과 쉽게 전파되어 웹을 감 동시키는 그들의 감수성 안에서의 나오는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서, 이러한 시적 확산의 다 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인(넓은 의미로)의 고독은 종교인을 앞서고 넘어서는 ‘여행’이며, 이 여행을 통해서 확신이 드는 점은, 살기 위해서는 ‘형태를 옹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말하는 자들의 특성인 이 ‘심금울리기’를 전달하여 혁신이 요구되는 과감함, 가치 있는 보편적인 자유에만 시간을 할애하며, 예기치 못한 것과 경이로운 것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신뢰의 필요성’에 관한 파리7대학의 강의를 코쇙병원의 솔렌회관으 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우울증, 자살성향, 식욕부진증, 마약중독 혹은 과격해지고 있는 상태의 청소 년들을 맞이합니다. 14세 소녀인 수아드는 회교도 가정 출신입니다. 식욕부진증으로 치료를 받았었는 데, 많은 소녀들이 겪고 있는 증상으로, 이는 육체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가며 버림받고 이해받지 못한 소녀들이 자기 안의 여성성과 모성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2년 후 식욕부진증은 치료되었는데 수 아드의 갈등 상황은 다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부모와 학교 선생님과 함께 왔는데 부르카를 쓰고 말 을 한 마디도 안 했으며, 인터넷 안의 낯선 공모자들과 함께 자신의 가족을 “배교자, 신앙심이 없는 자들보다 더 나쁜” 자들로 간주하고, “저쪽”(IS 요원들이 있는 곳)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며 일부다처제 전사들의 뜨내기 아내, 희생자들의 다산모 혹은 스스로 가미카제가 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아드는 혼합다문화의 심리분석치료자들과 담화를 시작했는데 자신이 “과학적 사고"를 지니고 있 고 수학과 물리, 화학에 강하다고 하면서 “유일하게 알라 신만이 진실을 말하고 그녀를 이해할 수 있 다"고 도발적으로 말합니다. 문학에는 “관심이 없고” “프랑스어 수업과 철학 수업을 증오”해서 “가능하 면 수업에 빠지려고” 합니다. 그 언어가 식민통치자들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녀가 피하고 비난하는 언 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수아드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새로운 가족처럼 된 치료자들과 장난을 치고, 다른 사람들과 웃거나 자신을 조롱하는 일에 재미를 느 끼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와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고 언어를 통해 파괴 충동과 고통스런 감정을 다스 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주위 사람들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 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의 고통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언젠가는 표 현하게 됩니다. 다른 청소년들은 치료사들과 같이 하는 글쓰기와 연극 활동 모임에 수아드와 함께 자 주 나갑니다. 수아드는 그들에게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아랍 시집 한 권을 빌려 읽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프랑스어 수업에 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바지를 다시 입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롤랑 바르트는, 한 언어의 충만한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면 “신적 허무는 더 이상 위협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저는 “신의 전체주의적 장악도 더 이상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고 말하겠습니다. 사우드는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긴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자신이 속한 고향의 아랍어로 쓰인 시를 들을 기회, 다른 사 람들과 시를 써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혼란스런 정체성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까?

***

 ‘오늘날 어떻게 시인이 될 수 있겠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는지, 문학가, 소 설가, 수필가가 될 수 있는지, 당신의 독자가 누구인지, 잡지들, 배포부수, 당신의 새로운 발상, 당신의 한계에 대해 말입니다.
끝맺기 전에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질문을 덧붙이겠습니다.
시적 언어는 모국어를 펼쳐내며 정체성, 특히 국가적 정체성을 열어주고 새롭게 합니다. 정체성은, 세대에 뒤떨어진 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제가 강조하지만, 무력감을 치료해줍니다(이것이 19세기 초에 벌써 횔덜린이, 찢어져버렸으나 새로운 대체물을 찾지 못한 낡은 정체성에 대항하는 정체성인, ‘형태’ 를 찾던 이유가 아닐까요?). 그럼에도 시인에게 정체성이란, 제가 이해한 바로는, 첼란이 말한 대로, 상처로 남아있는데, 그 곳에 개별적인 숨길이 각인되어 여러 정체성들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견디게 해주며, 콜레트가 말한 것처럼, 영원히 다시 태어납니다. 유럽의 정체성에 관해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무력감과 과거 혹은 현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 시 적 회상은 정체성이 종교가 아니고 중요한 질문거리인 문명권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 런 문명권 안에서는 시가 허무주의와 초월성을, ‘덜 나쁜’ 정치와 종교적 야만성을 서로 대립시키는 것 이 가능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시적 언어와 글쓰기에 중요한 자리를 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 다. 트위터도 자기 도취적 SNS도 비탄 그 자체도 당신에게 별 의미를 주지 못할 때, 그리고 할 말이 더 이상 없을 때, 여러분들도 저처럼 시, 소설, 연극, 영화, 음악회 같은 “큰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한 것을 잘 기억하신다면, 제가 생각하는 시 쓰기는 시간을 헤치고 나가는 상처처럼 새로운 탄생을 가능케 해주고, 우리들과 저로 하여금 인터넷사용자들의 시 쓰기와 수아드가 자신의 웃음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가냘픈 떨림을 더 잘 듣도록 해줍니다.

▶ 번역 : 김영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