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 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①풍금 ②사랑손님과 누님 ③봉선화 꽃물 들인 소녀 ④기찻간 변사사건 관련 진술서 ⑤연애편지
① 원 샷으로 , 상강 상강 ② 마곡을 어루만지고, 혼자인 걸 못 견디죠
첫 번째｜ 그리고…… 28년 두 번째｜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들과는 상관없는, 검은 단어 세 번째｜변하지 않는 자리 네 번째｜ 구조신호를 듣는 법
①제25회 대산문학상｜수상작선정 수상작리뷰｜시부문 수상작리뷰｜소설부문 수상작리뷰｜희곡부문 수상작리뷰｜번역 부문 ②윤동주문학기행｜하늘과 평등의 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륙, 『상실의 시대』 혹은 『노르웨이의 숲』
문학현장
그런데 정작 그를 혼란과 절망으로 내몬 것은 좌절감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른바 무중력 상황이다. 정해진 궤도 밖으로 떨려나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막막해진 것이다. “내 삶이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생각.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는 왜 잠가놓았는지 모를 책상 서랍을 부숴 열어본다. 그리고 그동안 개인의 고유한 기억을 덮어 버리면서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수동적인 인생을 아프게 자각한다. 수영의 청첩장을 통해 고등학생 때 그녀와 함께 랄프 로렌에게 보낼 편지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것이 마치 어긋나버린 삶의 실마리 를 찾을 단서라도 되듯이 랄프 로렌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랄프 로렌에서 조셉 프랭클로, 헨리 카터로, 레이첼 잭슨으로, 그리고 섀넌 헤이스까지. 주인공과 직 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상세한 자료와 연구와 추리와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고리는, 모름지기 소설이란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고 내적 성장과 각성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진지한 독자들 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종수의 추적은 객관적 진실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무중력 상태에 내던져 진 자가 뭔가를 붙잡으려는 간절한 자기 재편의 과정이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쓰레기더 미에서 그나마 쓰레기가 아닌 것을 가려내는 활동과 비슷했다.”
랄프 로렌이라는 끈을 붙잡고 거기에서 딸려 나오는 이야기를 좇는 동안 종수 자신이 드러나기 시 작한다. 그는 수업시간에는 잠만 자고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가며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 시키려는 수영에게 자신의 랄프 로렌 더플코트를 주겠다고 말했었다. 계급차를 현실에 개입시킴으로 써 수영에게 상처를 준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부모의 갑작스런 제안에 군말 없이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처럼 타인에 대한 감정뿐 아니라 자기에게조차 서툴고 오해투성이였던 과거의 모습을 필연적으로 대면하게 된 종수는 104세 잭슨 여사를 인터뷰하는 대신 잠들어 있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 어놓기 시작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다’고 말하는 섀넌과의 데이트 후 그는 왜 자신이 수영의 청첩장 을 서랍에 넣고 잠가버렸는지 깨닫는다. “나는 그저 도망친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 실로부터. 혹은 (아마도 이 편이 더 적절할 것 같은데) 내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미움받을 만한 사람이 라는 사실로부터.”
랄프 로렌에 대한 이 모든 추적에 마침표를 찍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종수는 생각한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계속했던 걸까? 거기에 대한 이모의 대답은 이야기의 세계와 사람의 삶을 압 축한다. “호랑이등에 올라탄 거지.” “누구나 그런 거야.”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바람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훑어 내려간 이야기들의 연쇄와 행로. 그것이 마 지막에 이르면 왜 이 소설에 실제와 허구가 섞여 있으며 배경이 미국이어야만 하고 살아 있는 랄프 로 렌이 고인으로 등장하는지, 왜 버젓이 시판 중인 랄프 로렌 시계가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물건으로 설 정돼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직소 퍼즐이 아니다.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춰 완성 된 그림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들 각자의 인생에 ‘디어(dear)’라는 표현만큼의 친 밀과 정중함, 그리고 사랑을 갖다 붙이면 된다.
Q.이 소설에 등장하는 ‘랄프 로렌 코트’와 그것이 갖고 있는 함의는 1980 년대 생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소재입니다. 특정 세대에만 공감이 가 는 소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셨는지요.
이 소설은 전적으로 저의 막내 동생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 었던 동생이 어느 날 어머니에게 랄프 로렌 더플코트를 사달라고, 그게 없으 면 창피해서 학교에 갈 수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동생과 같은 고등학교 를 나왔었고, 그 학교가 교복 착용에 굉장히 엄격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 문에 무엇이 학교의 분위기를 바꿔놓은 것일까? 저 애들에게는 그 코트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의문으 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특정 세대에만 공감이 가는 소재여서 부담스럽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이 소설을 구상할 때 결정적으로 작용한 건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저 자 신만의 개인적인 판단, 주관적인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소설은 언제나 작가라는 한 개인‘만’이 느끼는 공 감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믿고 있기도 하고요. 다만 이 소설을 읽으신 분들이 각자 자신만의 ‘랄프 로렌’을 발굴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Q.랄프 로렌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 야기는 실제와 허구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이처럼 실재하는 인물에 허구적인 내용을 가감할 때 거기에는 어떤 기준이 작용했는지 궁금합니다.
때때로, 『디어 랄프 로렌』 속에 나오는 인물이나 책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셨다 는 분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앞에서 말했듯이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 혹은 이름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반영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없으면 저 자신을 움직이게 만든 동 력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히는 것이지만, 저는 등장인물들이 ‘평행우주’에서 ‘정말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제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고요. 그들의 삶을 받아 적는다는 느낌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저에게 그 과정은 대부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Q.『디어 랄프 로렌』은 모범생이자 10여 년을 공부에 매진해 온 유학생 종수가 어느 날 삶으로부터 부 정 당하자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인지를 찾아가는 과정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종수의 인간적인 성장보 다는 랄프 로렌이라는 끈을 부여잡고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수고에 더 집중하신 이유가 있는지요.
종수가 랄프 로렌, 그리고 그와 연관된 사람들을 그토록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찾아다닌 것은, 결국 은 자신의 실패를 외면하기 위한 방편이었죠. 거기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거의 대부 분의 취재가 오로지 종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결국 종수가 그 많은 사 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깨닫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고 생 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종수가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실패한 적이 있고, 실수를 한 적이 있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 습니다.
Q.삶을 반추하는 과정의 끝에 종수는 결국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안겼던 기억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기억을 애써 찾아낸 종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중요한 건, 이 소설이 어쨌든 1인칭이라는 점입니다. 종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했고 몇 년이나 지 난 후, 종수는 이걸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정리하는 건, 그리고 자 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누군가를 상처 입힌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종수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 이 아니었겠죠. 종수가 누군가와 무언가를 위해 그 과정들을 책으로 남기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가 종수 가 한발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미세조정’이라는 개념을 좋아합니다. 우주가 만들어질 때, 아주 미세한 부분이라도 다르게 조정되었다면, 우주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개념입 니다. 저는 그 ‘미세’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끌립니다. 종수의 삶이 아주 많이 바뀌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변화가 어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우주의 모습,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놓을 수 있 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 인 종수는 그 이후에 타인을 바라보거나 타인에 대해 판단할 때 그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게 되겠죠.
Q.앞으로의 작품 활동 계획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소설 쓰는 시간을 스스로가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제 스스로를 즐겁게 만드는 소설을 쓰 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즐겁다, 라는 표현이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저 쓰고 싶다, 라는 마음 하나 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어요. 결과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잘 쓴다면 더더군다나 좋겠죠.
수상작리뷰｜소설부문
글 은희경 ㅣ 소설가. 1959년생
소설 『중국식 룰렛』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새의 선물』 『태연한 인생』 『소년을 위로해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
내 의지와 상관없이 훑어 내려간
이야기들의 행로
• 손보미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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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는 세련된 텍스트를 만드는 작가이다. 세련이란 잘 다듬어지고 격조를 갖췄다는 뜻 이다. 한눈에 드러나기보다 우아하게 감춰져 있다. 『디어 랄프 로렌』도 그렇게 읽었다. 표면적 으로는 폴로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 랄프 로렌과 그 주변을 추적해가면서 그의 삶의 진실을 밝히려 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자기의 삶으로부터 파문당한 주인공이 과거를 추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에 접근해가는 이야기이다. 때로 자기 인생을 쓰는 작가나 기자를 참칭하면서.
뉴욕대 박사과정의 공학도 종수는 어느 날 지도교수로부터 ‘자네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통보 를 받는다. 연구실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것은 강남 중산층이라는 기득권의 지붕 밑에서 전교 3등 아 래로 떨어져본 적이 없었던 모범생의 세계와 10년여를 정해진 방향으로만 살아온 유학 생활로부터의 탈락을 의미했다. “이제 내 방의 문을 두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런데 정작 그를 혼란과 절망으로 내몬 것은 좌절감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른바 무중력 상황이다. 정해진 궤도 밖으로 떨려나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막막해진 것이다. “내 삶이 잡동사니에 불과하다는 생각.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는 왜 잠가놓았는지 모를 책상 서랍을 부숴 열어본다. 그리고 그동안 개인의 고유한 기억을 덮어 버리면서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수동적인 인생을 아프게 자각한다. 수영의 청첩장을 통해 고등학생 때 그녀와 함께 랄프 로렌에게 보낼 편지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것이 마치 어긋나버린 삶의 실마리 를 찾을 단서라도 되듯이 랄프 로렌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 글 은희경 ㅣ 소설가. 1959년생 소설 『중국식 룰렛』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새의 선물』 『태연한 인생』 『소년을 위로해줘』 『마지막 춤은 나 와 함께』 등 |
랄프 로렌에서 조셉 프랭클로, 헨리 카터로, 레이첼 잭슨으로, 그리고 섀넌 헤이스까지. 주인공과 직 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상세한 자료와 연구와 추리와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고리는, 모름지기 소설이란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하고 내적 성장과 각성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진지한 독자들 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종수의 추적은 객관적 진실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무중력 상태에 내던져 진 자가 뭔가를 붙잡으려는 간절한 자기 재편의 과정이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쓰레기더 미에서 그나마 쓰레기가 아닌 것을 가려내는 활동과 비슷했다.”
랄프 로렌이라는 끈을 붙잡고 거기에서 딸려 나오는 이야기를 좇는 동안 종수 자신이 드러나기 시 작한다. 그는 수업시간에는 잠만 자고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가며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 시키려는 수영에게 자신의 랄프 로렌 더플코트를 주겠다고 말했었다. 계급차를 현실에 개입시킴으로 써 수영에게 상처를 준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부모의 갑작스런 제안에 군말 없이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처럼 타인에 대한 감정뿐 아니라 자기에게조차 서툴고 오해투성이였던 과거의 모습을 필연적으로 대면하게 된 종수는 104세 잭슨 여사를 인터뷰하는 대신 잠들어 있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 어놓기 시작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다’고 말하는 섀넌과의 데이트 후 그는 왜 자신이 수영의 청첩장 을 서랍에 넣고 잠가버렸는지 깨닫는다. “나는 그저 도망친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 실로부터. 혹은 (아마도 이 편이 더 적절할 것 같은데) 내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미움받을 만한 사람이 라는 사실로부터.”
랄프 로렌에 대한 이 모든 추적에 마침표를 찍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종수는 생각한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계속했던 걸까? 거기에 대한 이모의 대답은 이야기의 세계와 사람의 삶을 압 축한다. “호랑이등에 올라탄 거지.” “누구나 그런 거야.”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바람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훑어 내려간 이야기들의 연쇄와 행로. 그것이 마 지막에 이르면 왜 이 소설에 실제와 허구가 섞여 있으며 배경이 미국이어야만 하고 살아 있는 랄프 로 렌이 고인으로 등장하는지, 왜 버젓이 시판 중인 랄프 로렌 시계가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물건으로 설 정돼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직소 퍼즐이 아니다.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춰 완성 된 그림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들 각자의 인생에 ‘디어(dear)’라는 표현만큼의 친 밀과 정중함, 그리고 사랑을 갖다 붙이면 된다.
| 수상자인터뷰 소설은 작가 한 개인만이 느끼는 『디어 랄프 로렌』 • 손보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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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전적으로 저의 막내 동생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 었던 동생이 어느 날 어머니에게 랄프 로렌 더플코트를 사달라고, 그게 없으 면 창피해서 학교에 갈 수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동생과 같은 고등학교 를 나왔었고, 그 학교가 교복 착용에 굉장히 엄격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 문에 무엇이 학교의 분위기를 바꿔놓은 것일까? 저 애들에게는 그 코트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의문으 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특정 세대에만 공감이 가는 소재여서 부담스럽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이 소설을 구상할 때 결정적으로 작용한 건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저 자 신만의 개인적인 판단, 주관적인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소설은 언제나 작가라는 한 개인‘만’이 느끼는 공 감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믿고 있기도 하고요. 다만 이 소설을 읽으신 분들이 각자 자신만의 ‘랄프 로렌’을 발굴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Q.랄프 로렌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 야기는 실제와 허구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이처럼 실재하는 인물에 허구적인 내용을 가감할 때 거기에는 어떤 기준이 작용했는지 궁금합니다.
때때로, 『디어 랄프 로렌』 속에 나오는 인물이나 책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셨다 는 분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앞에서 말했듯이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 혹은 이름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반영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없으면 저 자신을 움직이게 만든 동 력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히는 것이지만, 저는 등장인물들이 ‘평행우주’에서 ‘정말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제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고요. 그들의 삶을 받아 적는다는 느낌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저에게 그 과정은 대부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Q.『디어 랄프 로렌』은 모범생이자 10여 년을 공부에 매진해 온 유학생 종수가 어느 날 삶으로부터 부 정 당하자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인지를 찾아가는 과정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종수의 인간적인 성장보 다는 랄프 로렌이라는 끈을 부여잡고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수고에 더 집중하신 이유가 있는지요.
종수가 랄프 로렌, 그리고 그와 연관된 사람들을 그토록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찾아다닌 것은, 결국 은 자신의 실패를 외면하기 위한 방편이었죠. 거기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거의 대부 분의 취재가 오로지 종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결국 종수가 그 많은 사 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깨닫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고 생 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종수가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실패한 적이 있고, 실수를 한 적이 있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 습니다.
Q.삶을 반추하는 과정의 끝에 종수는 결국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안겼던 기억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기억을 애써 찾아낸 종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중요한 건, 이 소설이 어쨌든 1인칭이라는 점입니다. 종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했고 몇 년이나 지 난 후, 종수는 이걸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정리하는 건, 그리고 자 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누군가를 상처 입힌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종수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 이 아니었겠죠. 종수가 누군가와 무언가를 위해 그 과정들을 책으로 남기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가 종수 가 한발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미세조정’이라는 개념을 좋아합니다. 우주가 만들어질 때, 아주 미세한 부분이라도 다르게 조정되었다면, 우주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라는 개념입 니다. 저는 그 ‘미세’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끌립니다. 종수의 삶이 아주 많이 바뀌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변화가 어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우주의 모습,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놓을 수 있 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 인 종수는 그 이후에 타인을 바라보거나 타인에 대해 판단할 때 그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게 되겠죠.
Q.앞으로의 작품 활동 계획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소설 쓰는 시간을 스스로가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제 스스로를 즐겁게 만드는 소설을 쓰 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즐겁다, 라는 표현이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저 쓰고 싶다, 라는 마음 하나 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어요. 결과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잘 쓴다면 더더군다나 좋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