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눈 오는 地圖지도

무참한 시대의 독백

우리나라 시낭송 운동 50년

감각을 바꾸지 못하는 예술은 비윤리적

복수의 계절에 「햄릿」을 다시 본다

주요섭 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①풍금 ②사랑손님과 누님 ③봉선화 꽃물 들인 소녀 ④기찻간 변사사건 관련 진술서 ⑤연애편지

겨울 들판을 거닐며

대산 100년, 대산문화재단 25년

지금 내게 다가오는 것들이 내 스승이다

노나메기 세상을 열기 위해 끝없는 젊음을 사는 당신

영원한 가을

병란에 대처하는 두 개의 길

2004년에 멈춘 시간

북방의 시인, 곽효환

『탁류』는 물이 아니라 군산 사람들의 얼굴이다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수학여행

① 원 샷으로 , 상강 상강 ② 마곡을 어루만지고, 혼자인 걸 못 견디죠

① 돈의 수사학 ② 시간의 문법

첫 번째| 그리고…… 28년 두 번째|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들과는 상관없는, 검은 단어 세 번째|변하지 않는 자리 네 번째| 구조신호를 듣는 법

은하열차

시인이자 번역가로서 새롭게 발견된 피천득

①제25회 대산문학상|수상작선정 수상작리뷰|시부문 수상작리뷰|소설부문 수상작리뷰|희곡부문 수상작리뷰|번역 부문 ②윤동주문학기행|하늘과 평등의 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륙, 『상실의 시대』 혹은 『노르웨이의 숲』

위로가 소용없는 세대를 위한 위로

‘블랙리스트’ 사건, 표현의 자유를 지킬 근본적 해결책 제시돼야

‘기억 잃음’을 기억하기

나의 의미는 만드는 것

‘종이’라는 지배적 메타포 옮기기

한국전쟁과 스무 살 처녀의 내면 풍경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선 인간

대산창작기금,외국문학 번역지원 등

대산문화재단 신창재 이사장 프랑스 최고 권위 훈장 레종도뇌르 수훈 등

가상인터뷰

감각을 바꾸지 못하는 예술은 비윤리적

글 최진석 ㅣ 평론가, 인문학자. 1974년생
저서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국가를 생각하다』(공저), 『불온한 인문학』(공저), 역서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해체와 파괴』 등

질 들뢰즈(Gilles Deleuze) ㅣ 프랑스 철학자. 1925~1995년
저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천의 고원』 『카프카』 『안티 오이디푸스』(이상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 『감각의 논리』 『의미의 논리』 『비평과 진단』 등

          감각을 바꾸지 못하는 예술은 비윤리적
                  - 질 들뢰즈와의 인터뷰

                                    1. 철학, 생성의 사유

 

최진석  반갑습니다. 저쪽 세계에서 편히 쉬고 계시는 중에 갑자기 불러내서 놀라진 않으셨나요? 이 글을 읽는 독자들마저 놀래키지 않으려면 뭔가 알찬 인터뷰가 되어야 할 듯합니다.

들뢰즈  저도 반갑군요. 주어진 시간과 지면이 길지 않다는데, 잘 답변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부탁합니다.

최진석  오늘 당신과 나눌 대화의 주제는 철학과 예술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신에 대해 잘 모를 분들도 있을 터라 간단히 소개 말씀 올리려 합니다. 지면 관계상 핵심만 정리해 왔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들뢰즈  한번 들어 볼까요.

최진석  당신은 1925년 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으니 거의 토박이라 할 만하네요.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즈음 소르본 대학에 들어가 조르주 캉길렘, 장 이폴리트 등에게 배우셨군요. 대체로 연구하고 책쓰기를 반복하는 반듯함이 철학자 들뢰즈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동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비교하면 좀 지루한 풍경이랄까요. 아무튼 저술활동이 엄청납니다. 1953년 첫 번째 책으로 흄에 대한 연구서 『경험주의와 주체성』을 냈고, 이후 『니체와 철학』(1962), 『칸트의 비판철학』(1963),『베르그송주의』(1966) 등을 연달아 출간하며 학문적 커리어를 확실히 다져 놓았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대학을 거치며 교편도 잡았는데, 같은 시기에 유명세를 떨쳤지만 대학에서는 냉대받은 데리다와는 사뭇 비교되는 느낌이 드는군요.

들뢰즈  제가 운이 좋은 편이었죠.

 

최진석  1968년 국가박사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과 부논문 『스피노자의 표현의 문제』를 출간하면서 근대 철학으로부터 이탈하는 사유의 노선을 분명히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1969년 파리 8대학에 임용되어 8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일했죠. 1990년대에 한국에서 주목받았던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라캉이나 푸코, 알튀세르, 데리다 등과는 확실히 다른 이력을 갖고 계십니다. 라캉이 세미나나 공개강연 등으로 이름을 떨쳤고, 푸코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겸하며 저술과 강연을 이어갔으며, 알튀세르는 대학에서 일했지만 프랑스 공산당원으로서 선명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던 데 비해 당신은 대단히 모범생 같은 인생을 살았던 셈이거든요……

들뢰즈  현장에 참여하는 것만이 사유의 급진성을 보장하는 건 아니랍니다. 음, 제 이력의 후반부가 오늘 인터뷰에서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최진석  맞습니다. 사실 지금부터가 핵심이죠. 당신이 그저 교수생활에 젖어서 권위나 누리며 살았더라면 오늘의 인터뷰 자체가 없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철학자 개인의 이력과 사유의 행로를 평면적으로 이어붙일 수 없음을 잘 보여준 게 당신 들뢰즈니까요. 『차이와 반복』은 난해하기로 소문났지만 그만큼 이전의 철학 전통과는 다른 획을 그은 책이라 할 만합니다. 간단히 말해 20세기 ‘차이의 철학’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한 저작이라 할까요? 데리다나 레비나스도 차이의 철학자로 불리기는 하지만, 당신의 책을 빼놓고 ‘차이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당신은 차이를 어긋남, 타자성뿐만 아니라 생성이라는 관점에서도 조명하기 때문이죠.

들뢰즈  그래요. 저로서는 기존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차이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그저 다르다는 게 아니라 다름이 곧 생산이 되는……

최진석  생성에 대해서라면 『의미의 논리』(1969)도 언급해야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생략하겠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건은 펠릭스 가타리와 만나면서 일어났기 때문이죠. 정신분석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가타리는 경력상 당신과 딱 맞는 파트너로 보이진 않습니다. 그는 좌파적 변혁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고 정신분석의 사회적 실천을 지향했거든요. 아카데미의 연구자 타입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던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고, 함께 책을 쓰자고 결의하기에 이릅니다. 그 결과물이 『자본주의와 분열증 1: 안티 오이디푸스』(1972)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1975),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천의 고원』(1980)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였습니다.

 

들뢰즈  겉으로는 안 어울리는 듯 보여도 사유의 궁합은 견줄 데 없이 잘 들어맞는 경우겠죠. 가타리가 번개처럼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제가 피뢰침이 되어 그걸 받아쓰곤 했으니까요.

 

최진석  가타리를 만나고 당신이 ‘변했다’는 평가도 없진 않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사람은 가타리 때문에 유망한 형이상학자가 경력을 망쳐버렸다고 악평을 쏟아냈거든요. 하지만 두 사람의 작업이 1960년대 이래 유럽 지성사의 큰 흐름을 예견하고 선도했다는 평가도 정확한 것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68혁명의 이론적결산’이란 찬사를 받기도 했죠. 심지어 탈주선을 가르치던 당신의 강의실에 폭주족들이 난입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들뢰즈  하하하, 그들이 조금 오해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런 적도 있었죠.

                           


                                   2. 예술, 감각의 사건


최진석  예술과 관련해서도 덧붙일 게 적지 않습니다. 홍차와 마들렌 과자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서도 책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1965)이 그렇죠. 종종 문학작품이나 연극비평에 관한 글도 쓰셨구요. 하지만 역시 유명한 저술은 1981년에 출판된 『감각의 논리』인데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베이컨의 섬뜩한 그림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꽤 넓어졌다고들 하죠. 그리고 1983~5년 사이에는 『시네마』라는 두툼한 책을 두 권 내셨죠. 영화이론으로 ‘오해’하고 집어든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내던지는 책이라고들 하지만…… 문학에 관한 글들을 모은 『비평과 진단』(1993)도 추가할 만합니다. 세상에, 많이도 쓰셨군요!

 

들뢰즈  철학과 예술을 딱 구분하여 글을 쓰진 않았지요. 따져보면 서로 뒤섞여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겁니다. 글쓰기를 장르별로 분별하는 근대적 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최진석  ‘근대적’이란 말을 꺼내셨으니 거기서부터 본론을 시작해 볼까요? 근대성의 ‘괴수’ 정도로 취급받는 헤겔은 『미학』에서 예술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은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까지는 유용했지만, 19세기에는 철학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근대의 예술이론은 헤겔의 종언론에 대한 답변이자 주석, 반박의 목록이라고도 할 법한데요.
당신은 예술과 근대성에 관해 어떤 입장이신가요?

들뢰즈  근대 예술의 지상과제는 현실의 재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문자나 이미지로 ‘다시’ 옮겨놓는 것 말입니다. 잘 그리는 화가라면 어제 본 대상을 오늘 화폭 위에 정교하게 복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동일하게 옮기는 일은 모종의 척도와 위계를 전제하지요. 쉽게 말해, 원본은 무엇이고, 원본과 복제물은 얼마나 같고 다른가에 관한 질문이 생겨난단 말입니다. 그 같고 다름의 차이를 권력의 차이로 환원시켜 강요했던 게 ‘순수성’을 표방했던 근대 예술의 ‘비순수성’이었던 셈이지요.

최진석  권력은 푸코가 평생 연구했던 주제였죠.

들뢰즈  맞아요. 그런데 제 관심사는 권력보다는 재현의 불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어제 본 것과 오늘 본 것이 과연 똑같은가? 재현이라는 과제는 두 대상이 변함없이 똑같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어떻게 할 텐가요? 시간은 동일하게 재현되어야 할 대상의 ‘사이’를 만들고 ‘차이’를 낳습니다. 이 인터뷰를 시작할 때의 최진석 씨보다 지금의 최진석 씨가 조금 더 늙었고, 조금 더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최진석  그것 참…… 적절한 예로군요(불끈!). 

들뢰즈늙고 죽는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세요. 당신은 아까보다 더 늙고 더 죽음에 가까워졌지만, 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생겨난 변화가 단지 노화나 줄어든 수명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식이나 감각에서도 무언가 달라진 게 있을 테지요. 새로운 사건을 경험하고 얻은 앎의 증대나 감각의 확장은 그 이전과 이후를 분할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낳습니다. 이 인터뷰가 끝나면 당신이나 나나 인터뷰 이전의 자신들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작든 크든,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언가 달라져 버렸고, 그로써 우리의 삶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최진석  그런 게 사건이란 말씀이군요? 그게 예술과 어떻게 관련될까요?

들뢰즈  예술은 재현이 아니라 사건과 연관됩니다. 사건은 서로 다른 요소들이 마주치면서 빚어내는 낯선 의미의 발생을 가리키죠. 내가 『의미의 논리』에서 이야기한 계열화란 그렇게 상이한 요소들이 서로 엮이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의 연속성을 뜻합니다. 흔히 예술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죠. 이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작품 속에 작가가 묻어둔 의미를 발견하고 복원해 내려는 비평가는 재현작업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원본적 의미만을 인정하고 그 이외에는 가짜라고 배척하는 태도가 그것이죠. 하지만 예술이 사건이라면, 의미가 계열화의 산물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가 원래 거기에 집어넣었던 의미가 무엇이냐를 따질 수 없습니다. 오직 작품과 지금 여기서 마주치는 해석자 사이의 관계, 즉 작품과 해석자가 새롭게 창출하는 사건적 계열이 파생시키는 낯선 의미만이 있는 겁니다. 예술의 종언이라는 헤겔의 테제는 사건이라는 관점에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에요.

최진석  작가의 의도로부터 예술작품을 분리시켜 독자나 관객의 지평에 개방시켜 놓는 것은 현대 예술비평의 중요한 입장이잖아요? 원작자가 무엇을 말했든 작품의 의미는 그것을 보고 읽는 수용자의 태도나 해석에 달려있다는. 아무튼 작품의 의미는 수용자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새롭게 갱신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작품 자체보다 수용자의 관점만이 너무 중시되는 건 아닐까요? 작품이야 어찌됐든, 수용자만이 중요하다는 주장처럼 들려서 말이죠.

들뢰즈  제 입장을 수용미학과 겹쳐놓으시면 곤란할 듯싶네요. 제가 이래봬도 철학자라서…… (하하하) 작품 자체가 중요합니다. 만일 수용자의 태도나 해석만이 중요하다면 반드시 예술에 관한 이야기로 한정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나는 예술작품은 감응(affect)의 응결물이라 답하고 싶습니다. 감응은 인식에 의해 명확히 재단되기 이전의 무의식적인 감각의 발생과 이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피노자가 쓰던 개념인데, 내가 좀 갈고 닦아서 새로 제시해 보았습니다. 예술가는 남이 보거나 듣지 못하는 특별한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이죠. 일상인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세상의 사물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특수하게 조형하여 작품으로 만드는 게 그들의 일입니다. 미학(aesthetics)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감각학’이듯, 예술은 감각적 차이에 관한 지각능력이라 정의해야 적절할 듯싶네요. 예술작품이란 예술가가 지각한 사물의 특이성을 색이나 소리, 문자의 배치속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감응의 응결물이란 그걸 말하는 겁니다.


                                    3. 감응, 예술의 본래면목

최진석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야기군요. 거기서 당신은 철학이 개념을 통해 무한이라는 사건을 담아내고, 과학이 함수를 통해 사물의 상태를 포착하는 반면, 예술은 감응으로써 변화를 응결시키는 작업이라 말했죠.


들뢰즈  잘 기억하시는군요. 감응은 무의식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을 물질적인 형태로 포착해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양감이나 질감을 살리라는 뜻은 아니에요. 예컨대 색채나 촉감, 소리에 의하지 않고 순전히 상상력에만 의지하는 문학작품을 봅시다. 소설책은 문장의 흐름에 따라 독자의 의식을 이끌어 갑니다. 하지만 서사적 전개와 묘사적 기술이 단지 이성만을 자극하진 않죠. 사건을 텍스트로 옮겨놓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차이가 생겨나고, 독자는 그 차이를 메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지식이나 감성적 한계를 벗어나는 지점들을 마주칩니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예로 들어 보죠. 바틀비가 고용주의 요구에 대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계속 답하는 장면을 볼 때, 독자는 가슴 속에 답답증이나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낄겁니다. 도대체 거부의 합리적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죠. 동시에 바틀비의 그런 ‘똥고집’이 어떤 결과를 불러낼지,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유혹을 느낍니다. 어떻게 결말이 날지 두고 보자는 심정에는 바틀비의 선택 아닌 선택에 대한 매혹, 무의식적으로 바틀비에게 이끌려가는 욕망의 운동이 있습니다. 감응은 바틀비에 의해 격동되어 흐르기 시작한 독자의 마음 상태입니다. 바틀비가 독자를 흔들어 놓았고, 흔들린 독자는 다시 바틀비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소설은 허구고 바틀비는 공상의 인물입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 독자의 무의식과 욕망, 마음이 변화를 겪는 것이죠. 감각의 운동은 반드시 물질성에만 의존하는 게 아닙니다. 관계라는 것 역시 감각을 추동시키고 반응하게 만들죠. 감응은 그러한 감각의 (무)의식적인 운동을 가리킵니다.

 

최진석  아마도 예술작품의 힘은 수용자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는 감응능력에 있다는 말씀이겠군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감동받는다’고 하는 말도 비슷한 게 아닐까요?

들뢰즈  그런 면도 있죠. 하지만 통념에 의지하는 감동은 우리가 이미 예상했던 것을 확인시켜주고 위험하지 않은 변화만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인 감응과 다릅니다. 왜 무의식이 중요할까요? 무의식은 정의상 억압된 것이지요.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면 여러 모로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나=나’라는 방어막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의식은 그 방어막을 지키는 파수병으로 복무하는 것이에요. 감응은 ‘나=나’ 따위의 정체성을 돌보지 않습니다. 순전히 신체와 감각에 관련된 작용만이 문제가 되는 거죠. 예술이 위험한 것이라면, 그건 예술이 우리의 정체성을 해체시킬 다양한 촉발요인들을 갖고 침투하는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런 예술을 거부하고 배척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느끼고[感] 벌써 반응[應]할 수밖에 없답니다.

최진석  『감각의 논리』는 그런 감응능력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군요? 베이컨의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끔찍하다는 느낌을 쉽게 버리지 못하죠. 도대체 사람인지 고깃덩이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무정형의 이미지들 때문입니다. 인물의 형상은 짓뭉개져 있고, 익숙한 사물의 형체는 해체되어 사방으로 흘러 다니는 액체적 이미지로변환되어 있지요. 그로테스크적인 섬뜩함이 지배적인 분위기를 이룹니다. 감응능력도 그와 관련이 있을까요?

들뢰즈  회화의 진실은 대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들 합니다. 예의 재현의 논리죠. 하지만 시간에 노출된 사물은 필연코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럼 변화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아까 최진석 씨는 인터뷰의 시작 때보다 더 늙어버렸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약간 더 늙었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그저 똑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십년, 이십 년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나면 같은 사람이라 인지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동일성을 통해 인식하는 대상은,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변화라는 요소를 제거한 채 시간을 딱 정지시켜서 포착한 순간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겠죠. 예술사에서 사실주의는 세계의 진실을 보겠다고 하고서는 순간의 사실만을 보고 말았어요. 오히려 이 세계의 본래 면목이란 흘렀다가 뭉치고 다시 흐름의 평면에 놓이게 되는 변화 자체가 아닐까요? 감응능력은 그와 같은 변화에 대한 감각입니다.

하지만 자기 맘대로 감각하고 말고를 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원하지 않을 때조차 강제로 느끼고 반응할 수밖에 없는 개방된 능력을 가리키지요.

최진석  원하지 않아도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라…… 그래서 무의식적인 것이로군요.

▲ 벨라스케스와 베이컨의 <이노센트 10세>  

들뢰즈  베이컨의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안정감 대신 그로테스크한 낯설음을 전달하죠. 우리는 사태의 고정된 단면만을 보고 알아왔는데, 그는 변화의 지속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베이컨이 포착한 것은 그런 낯선 감각입니다. 벨라스케스의 <이노센트 10세>라는 그림을 보세요. 영화로운 권좌에 앉아 불멸의 권위를 누리는 교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베이컨이 재구성한 그림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죠. 의자가 몇 가닥의 선들로 분해되어 더 이상 영광스럽지 않고, 교황 자신은 빛의 간섭현상을 겪는듯 바탕과 중첩되어 해체되고 있습니다. 단단하던 권위에 찬 표정은 비명을 지르는 듯 벌린 입의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감을 주기도 하죠. 이건 인물의 특정한 순간을 재현한 초상화가 아니에요. 교황이 응축하고 있는 영구불변의 분위기, 그 순간성을 시간의 평면 위에 펼쳐 놓은 흐름의 이미지라 할 수 있어요. 벨라스케스가 초상화를 그리며 배제해 놓은 변화의 요소를 투입시켜 재구성한 것이 베이컨의 작업입니다. 그의 이미지들은 변이의 관점에서 보아야 해요. 머리로 아는 것보다 감각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게 중요하겠죠. 사람들이 두렵고 끔찍하게 느끼는 건, 거기서 정형화된 형상이나 완성된 사물의 형태를 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게 안정감을 주니 말이죠. 하지만 삶의 진실은 불변하는 순간이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니, 베이컨의 이미지를 거북해 하는 것은 세계의 본래 모습에 제대로 감응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할 뿐입니다.


                                      4. 변화, 예술의 윤리


최진석  감응이란 말이 익숙지 않고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정리해 보면 사물과 세계의 변화를 감각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까울 듯합니다. 물론, 그건 의지에 따른다기보다 의지에 거슬러서라도 감각되는 것이란 점에서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고요. 그렇게 보면 감응능력은 감응을 시키는 것인 동시에 감응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들뢰즈  그렇습니다. 사실 보다 근본적인 측면은 감응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요. 느끼고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보면 잠재적으로는 더 큰 능동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도 되니까요. 생성은 그런차원에서 더욱 근원적인 운동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감응시키고 감응받는 계열적 관계를 이루고 있고, 그것이 앞서 말한 의미의 사건이란 점은 잘 아실 겁니다. 요컨대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다른 관계로 변형되고 이행할 뿐이지요. 감응은 생성을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개념인 셈이죠.

최진석  예술도 그런 것이겠죠? 변이와 이행을 포착해서 응결시킨 게 예술작품이라면, 수용자가 예술작품과 마주쳐서 벌어지는 사건은 그러한 변화의 감각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을 경험한 후 아무 차이도 감지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좀 불행할 듯싶네요.

 

들뢰즈  그럴 겁니다. 하지만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의 감각에는 모종의 변화가 이미 벌어지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삶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든 경험은 언제나 사건적이라 할 수 있답니다.

최진석  밀란 쿤데라는 독자의 인식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소설은 비도덕적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당신에게는 감각의 변화를 불러내지 못하는 예술은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더 이야기할 게 쌓이고 쌓였지만, 여기서 인터뷰를 마감해야 할 듯싶습니다. 독자들은 서운할 테지만 저는 뒤풀이 자리에서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예정이에요~ 하하하. 수고하셨습니다!

들뢰즈  쿤데라와의 비유는 재미있고 적절하군요. 하하하. 저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포도주한 잔하러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