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위로慰勞

“축구는 내 사명… 월드컵 우승의 초석이 됐으면… - 차범근 감독과의 만남

일출과 일몰처럼

눈부처를 바라보며 화쟁의 길을 묻다 - 원효대사와의 가상 인터뷰

근대 예술과 그 이후

특집을 기획하며|B급, 非급, 秘급 ①B라는 말로 우리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들 ②비(秘)급을 향해, 그저 온전한 의지로서 ③비급 작가로 살기 ④도서출판 b, b급 맞습니까?

앙스트블뤼테(Angstblüte)와 말년의 양식(Late Style)

이제야 당신을 만납니다 -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

무거운 밥상에 칭찬 한 숟가락

무화되는 품위, 최선을 다하는 삶과 역사 - 2017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남아 있는 나날』

나는 표절 시인이다

봄날은 가고

고전 산문의 마지막 불꽃 - 조선 한문학의 마지막 대가 정인보의 『담원문록』

근대의술을 뿌리내리게 한 우두접종

“사랑, 추억 그리고 비애에 대한 거장다운 통찰” - 아일랜드의 맨부커상 수상작가 존 밴빌과의 만남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①강남 스타일,백 년 동안 새로운 노년 ②눈 내리는 거리,묘지 식탁

①파 란 ②문 앞에서

손등이 가렵다

첫번째|시인의 나무 세번째|술과 글 두번째|'문학'하는 요괴를 바라보며 네번째|문학이 죽으면 성실해지겠죠

①자신의 세계, 건강함 그리고 작가의식 ② 우리의 우리에게… 점과 점을, 잇는 선, 으로 이루어진, 육면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몇 개나 되는, 서로 다른, 세계. 그리고, 빛에 대해

장편소설 『지상(地上)의 사랑』과 소설가 이창동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 소설집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시가 된 삶, 삶이 된 시 - 영화 과

찬바람 부는 문학계

‘소년이 온다’에서 ‘인간의 작품’으로 - 독역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리뷰

번역의 출발선과 마침표에 대하여 -영역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전쟁과 전쟁문학, 그리고 인간 - 블라디미르 마카닌 장편소설 『아산』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8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다시 읽는 우리 문집

고전 산문의 마지막 불꽃 - 조선 한문학의 마지막 대가 정인보의 『담원문록』

글·사진제공 조운찬 ㅣ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 소장. 1963년생

▲ 위당 정인보 





  전하는 문집을 가지고 얘기하더라도 우리 한문학의 역사는 천수백여 년을 헤아린다. 그 시작으로 최치원을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통일신라시대 활동했던 그의 문장력은 한반도뿐 아니라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최치원은 자신이 편찬한 문집 『계원필경』을 남겼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래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이하 ‘총간’)은 『계원필경』으로부터 시작한다.

▲ 연세대 위당기념관 앞에 세운 정인보 흉상     

  그렇다면 한문학의 마지막 작가는 누구일까. 1천259종의 문집을 수록한 ‘총간’의 맨 마지막 책은 심재 조긍섭(1873~1933)의 『암서집』이다. ‘총간’은 1945년 이전에 활동한 문인들을 기준으로 문집을 선정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조긍섭이 최후의 한문학자이고 마지막 문집은 『암서집』이 된다. 그러나 학계는 심재 조긍섭을 꼽지 않는다. 위당 정인보(1893~1950), 산강 변영만(1889~1954) 등 뛰어난 한문학자들이 그 후에도 한문으로 문필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해방 이전에 사망한 문인의 문집을 대상으로 한다는 ‘총간’의 간행 기준에 맞지 않아 ‘총간’에서 제외됐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통 한문학의 견지에서 최후의 한문학 대가는 누구일까. 학자들은 위당 정인보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위당은 역사와 전고(典故)에 밝았을 뿐 아니라 전통 고문을 구사하며 한문학의 맥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위당은 한문뿐 아니라 국문에도 능통했다. 그래서 위당은 한문학에서 국문학으로 이어지는 가교를 놓은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위당의 동년배로 젊은 날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춘원 이광수(1892~1950)조차 “문명(文名)을 흠모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최근 역대 한문학 대가들의 산문 600편을 모은 『한국 산문선』(안대회·이종묵·정민 등 편역, 민음사)에서 마지막을 정인보의 글로 채운 것은 이러한 학계의 흐름을 보여준다.

▲ 『담원 정인보 전집』(왼쪽)과 번역본 『담원문록』. 전집은 1983년 연세대출판부에서 간행됐다. 『담원문록』은 전집에앞서 영인 출간됐지만, 번역본(정양완 옮김)은 2006년에야 태학사에서 나왔다.     



식민지시대 의인들의 기록
‘묘도문자(墓道文字)’
  위당 정인보의 문집은 그의 또 다른 호 ‘담원(薝園)’을 딴 『담원문록』이다. 『담원문록』에는 행장·전(傳)·제문·묘비문·편지글·서문·한시 등이 담겨 있다. 원래는 필사본 상태로 있던 것을 연세대에서 1967년 1차 영인본으로 간행했다가, 1983년 『담원 정인보전집』을 편찬할 때 전집 제5, 6권으로 포함시켰다. 그 뒤 2006년 위당의 셋째 딸인 한문학자 정양완 교수가 전집에 포함됐던 『담원문록』을 떼어내 번역한 뒤 태학사에서 3권으로 펴냈다.
  위당은 조선 말기인 1893년 태어나 6·25 직후 납북됐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미상으로 처리됐다. 그러나 여러 증언 등을 토대로 현재는 1950년 9월 7일 황해도에서 폭격당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삶은 한말의 열강 침입, 일제 강점, 해방, 한국전쟁 등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당연히 그가 남긴 글은 당대의 현실과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담원문록』의 첫 글은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로 경술국치 당일 목숨을 끊은 홍범식의 순국을 적은 「금산군수 홍공(洪公)의 사장(事狀)」이다. 홍범식은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내자시 주사, 혜민원 참서관, 태인군수를 거쳐 금산군수를 역임하였는데, 군수 재직 때 국망을 당하자 자결하였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7월 25일(음력) 저녁, 홍범식은 금산지방법원 서기인 김지섭을 불러 유언장을 건넨 뒤 집에 가서 열어보라고 당부한다. 그런 뒤 그는 곧바로 금산 객사로 가 대궐을 바라보고 망궐례 의식을 치른 뒤 객사 아래채에서 목을 맸다. 이때 집안 심부름꾼에게 발각돼 실패하자 다시 객사 뒤뜰의 소나무에 목을 매 숨졌다. 앞서 홍범식은 남에게 빌려온 매화 화분도 돌려주고, 평소에 쓰던 서양 모자 대신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뒤 죽음을 준비했다. 홍범식이 자결하자 고을 아전은 물론 농군, 짐꾼, 아낙네, 어린아이들이 모두 나와 통곡하였으며 장례 때에는 금산에서 홍범식의 고향인 괴산까지 300리 상여 길을 100여 명이 따라갔다. 김지섭에게 쓴 편지에는 “나라가 망했네. 나는 죽으면 그뿐이니, 자네도 일찌감치 벼슬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게나”라고 쓰여 있었다(김지섭은 뒷날 의열단에 가입해 일본 궁성에 폭탄을 투척했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 망우리 문일평 묘소에 세운 묘비와 『담원문록』에 실린 「문호암 묘기」. 문집에 실린 글을 가감없이 그대로 빗돌에 새겼다.     


  위당은 홍범식의 생애를 두루 기록하기보다는 특정한 사건, 곧 그의 죽음을 부각시켜 기록했다. 대신 다른 행적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위당은 글 말미에 “형제간에 우애 있고 일가붙이 구휼하고, 벼슬한 동안의 치적 중 기록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공(홍범식)에 있어서는 오히려 하찮은 대목이라 모두 적지 않는다”라고 썼다.
  위당은 홍범식뿐 아니라 순국선열이나 독립운동가와 같은 의인을 기리는 글을 많이 남겼다. 『담원문록』에서 「향산 이공 순절유허비(이만도)」, 「월남 이공 묘비(이상재)」, 「남강 이공 묘비(이승훈)」, 「난곡 이선생 묘표(이건승)」, 「고하 송군 묘비(송진우)」, 「문호암 묘기(문일평)」, 「석전 황선생 묘비(황원)」 등 애국지사를 기리는 글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묘비, 묘기, 묘표, 묘지 등 죽은 이의 공적을 기리거나 추모하는 글을 ‘묘도문자’라고 하는데, 위당의 묘도문자는 식민지 시대를 기억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 자기 나라 역사를 제대로 기록할 수 없던 상황에서 위당의 묘도문자는 개인의 인물 전기이자,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산 역사이다. 호암 문일평의 일생을 짧게 쓴 「문호암 묘기」는 호암의 일대기이지만 임시정부 수립 전에 상해에서 활동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망우리 공원묘지의 문일평 묘소에 세운 비석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문집에 실린 「문호암 묘기」를 한 자도 빠짐없이 화강암 판에 새겨 액자처럼 바위돌에 끼워 넣은 묘비는 묘도문자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묘비명 가운데 ‘안함평갈’이라는 흥미 있는 글이 있다. 안함평 할머니는 성은 안 씨요, 이름은 출생지인 전라도 함평을 땄다. 그는 남편을 잃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악착같이 살아 논밭을 샀다. 말년에는 한해 80석을 수확하는 전답 모두를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에 기증했다. 보성전문을 맡고 있던 인촌 김성수는 할머니의 뜻이 고마워 생활비를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할머니는 자신은 걱정할 것 없다며 받지 않았다. 전 재산을 기증한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위당은 ‘안함평문’이라는 묘비문을 써주며 할머니의 뜻을 기렸다. 이 글에서 위당은 학교 측에서 할머니의 뜻을 기려 자료실를 만들고 ‘안함평실’이라는 편액을 걸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고려대에 지금도 ‘안함평실’이 있는지 궁금하다.

조선의 얼을 담은
역사 산문
  『담원문록』에서 묘도문자와 같은 추도 글을 제외하고 눈에 띄는 글은 역사 산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위당은 역사학자였다. 단재 신채호의 역사 연구 정신을 이은 위당은 ‘조선 얼’을 강조하며 역사 연구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역사연구서로 『조선사연구』를 남겼으며 『여유당전집』 편찬, 교열에 참여하며 1930년대 조선학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 「광복절의 노래」, 「삼일절의 노래」 초고. 위당은 해방 직후 광복절, 삼일절, 개천절의 노래 등 국가기념일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위당의 역사 산문은 그의 역사 연구 및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국상광개토경 평안호태왕 비문석략’은 논란이 된 광개토왕비의 ‘신묘년조(辛卯年條)’를 새롭게 해석한 글이다. 당시 일본 사학자들은 신묘년조를 ‘왜가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부수어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위당은 이렇게 풀었다. ‘왜가 신묘년(391년)에 쳐들어왔다.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쳐부쉈다.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여겼으므로 [병신년(39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잔을 쳐서 신라를 이롭게 하였다.]’ 위당은 기존 해석이 단락을 구분하지 못하고 문장의 주어를 혼동하면서 비문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위당은 신묘년조 바로 앞 구절이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라 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다’이고 뒤 구절이 ‘광개토왕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쳐 신라를 이롭게 했다’로 문맥이 이어진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에 따르면 ‘바다를 건너가 쳐부수었다(渡海波)’는 구절은 ‘왜가 백잔과 신라를 쳐부수었다’가 아니라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쳤다’로 이해해야 한다. 신묘년조를 둘러싼 학계의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다. 그러나 일본이나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데 반해 위당의 해석은 아직까지도 학계에서 설득력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위당은 「터무니없는 거짓을 바로잡는 글[正誣論]」에서 평양 지역이 옛 낙랑 지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사학자들의 학설을 반박하였다. 식민학자들은 낙랑 평양설의 근거로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봉니(封泥, 공문서를 봉합하기 위해 묶는 진흙 인장)를 든다. 그러나 위당은 봉니에 쓰인 문자가 한나라 제도와 부합하지 않으며 때로는 날조한 정황까지 있다며 낙랑 평양설을 부인했다. 위당은 또 조선 시대 문집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불을 지폈다. 특히 정약용(『여유당전서』), 홍대용(『담헌서』), 신경준(『여암전서 총서』), 김정희(『김추사전집』) 등의 저술을 간행하거나 학계에 소개하며 실학을 조선 후기의 학술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고전 산문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위당이 지은 글이 당대 의인들을 기록한 묘도문자나 시대인식을 담은 역사 산문으로 끝났다면, 문장가로 불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장가는 문명(文名)뿐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위당은 그러한 조건을 다 갖추었다. 「그리움을 적다(抒思)」는 문장가 위당의 글맛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13살 때 결혼해 7년 되던 해 사별한 동갑내기 첫 부인 성씨를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위당의 부모는 시집온 신부가 너무 어리다며 친정집에 더 머물다 오게 하였다. 3년이 지나 시집으로 다시 왔지만 신부는 여전히 열여섯의 앳된 소녀였다. 위당에게 신부는 아내라기보다는 첫사랑의 그리움을 안겨줬다. “아내는 자주저고리에 남치마 차림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앉았다가 내가 밖에서 돌아오면 말도 미처 하기 전에 자기 방으로 물러나 버렸다. 치마를 끌며 대청을 내려갔고, 급히 지게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에 늘 섭섭했었다.” 신랑신부 사이의 정은 애틋했다. 그러나 부부유별이라는 사대부 집안의 윤리로 서로 그리운 마음조차 내색하지 못했다. 같이 살면서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 그렇게 7년이 지나 그리움이 꽤 쌓이고, 스물이 됐을 때 위당은 중국행을 결심한다. 나라가 망하면서 무언가를 모색해야 했다. 위당은 아직 젊으니 부부의 회포를 풀 시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내와의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위당이 상해로 간지 7개월이 됐을 때 아내는 쌍둥이를 낳고 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
  산문 「그리움을 적다」는 아내가 죽고 14년이 지나서야 쓰였다. 함께 살던 7년, 그리고 아내가 죽고 그 갑절의 시간이 흘러서야 위당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낼 수 있었다. 이때는 다시 결혼을 했고 어머니도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그러나 전처에 대한 추억은 어머니보다도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나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으로는 죽은 아내보다 더할 이가 없다. 아내의 혼백이 아득하여 나는 더욱 슬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난날 함께 했던 즐거움, 어릴 적 놀던 일, 그리고 헤어져 그리워하던 정을 적어본다. 이는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서가 아니요, 그리움을 풀기 위해서일 뿐이다.”
  위당은 평소에 글은 진정성의 표현이라는 문장론을 펼치곤 하였다. 그는 지인 성환혁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드러내고 싶은 뜻이 있어야 하오. 말 못하게 분통스럽거나 불끈 성이 나서 스스로 풀 길 없는 것이 먼저 있는 뒤에야 글은 비로소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爲文必有所欲達之意. 悱然勃然愊憶而不自釋者, 在於其先而後, 文始爲達之之用].” 위당의 글이 독자의 마음을 적시며 문학사에 남게 된 것은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실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에 대한 추모의 글이든, 역사 산문이든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