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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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慰勞

“축구는 내 사명… 월드컵 우승의 초석이 됐으면… - 차범근 감독과의 만남

일출과 일몰처럼

눈부처를 바라보며 화쟁의 길을 묻다 - 원효대사와의 가상 인터뷰

근대 예술과 그 이후

특집을 기획하며|B급, 非급, 秘급 ①B라는 말로 우리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들 ②비(秘)급을 향해, 그저 온전한 의지로서 ③비급 작가로 살기 ④도서출판 b, b급 맞습니까?

앙스트블뤼테(Angstblüte)와 말년의 양식(Late Style)

이제야 당신을 만납니다 -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

무거운 밥상에 칭찬 한 숟가락

무화되는 품위, 최선을 다하는 삶과 역사 - 2017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남아 있는 나날』

나는 표절 시인이다

봄날은 가고

고전 산문의 마지막 불꽃 - 조선 한문학의 마지막 대가 정인보의 『담원문록』

근대의술을 뿌리내리게 한 우두접종

“사랑, 추억 그리고 비애에 대한 거장다운 통찰” - 아일랜드의 맨부커상 수상작가 존 밴빌과의 만남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①강남 스타일,백 년 동안 새로운 노년 ②눈 내리는 거리,묘지 식탁

①파 란 ②문 앞에서

손등이 가렵다

첫번째|시인의 나무 세번째|술과 글 두번째|'문학'하는 요괴를 바라보며 네번째|문학이 죽으면 성실해지겠죠

①자신의 세계, 건강함 그리고 작가의식 ② 우리의 우리에게… 점과 점을, 잇는 선, 으로 이루어진, 육면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몇 개나 되는, 서로 다른, 세계. 그리고, 빛에 대해

장편소설 『지상(地上)의 사랑』과 소설가 이창동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 소설집 『이 방에 어떤 생이 다녀갔다』

시가 된 삶, 삶이 된 시 - 영화 과

찬바람 부는 문학계

‘소년이 온다’에서 ‘인간의 작품’으로 - 독역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리뷰

번역의 출발선과 마침표에 대하여 -영역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전쟁과 전쟁문학, 그리고 인간 - 블라디미르 마카닌 장편소설 『아산』

대산창작기금,대산청소년문학상 등

2018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가상인터뷰

눈부처를 바라보며 화쟁의 길을 묻다 - 원효대사와의 가상 인터뷰

글 이도흠 ㅣ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기호학회 회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1958년생 저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역서 『엄마』 등

원효(元曉) ㅣ 신라시대 승려. 617~686년 661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다가 깨달음. 요석공주와 혼인, 소성거사라 칭하며 대중의 구제행에 나섬. 103종 208권의 저술 중 20부 20여 권이 현존하는데,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은 중국과 일본의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침. 일심(一心)의 화쟁사상으로 한국 불교의 가장 큰 산맥을 이룸.


1. 눈 내리는 날 분황사에서 원효를 만나다

눈이 내린다. 느린 직선의 하강에 눈길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덧 수평의 그리움은 시공을 초월한다. 황룡사의 드넓은 대지에도 소복소복 눈이 쌓인다. 사라진 것의 슬픔이 가슴 한 편에 머물다가는 이내 없는 것이 오히려 있는 것의 의미를 드러내는 역설에 자리를 내준다. 발길은 절로 분황사를 향한다. 사자상에도, 인왕상에도, 모전석탑의 옥개석에도, 선덕여왕 때 겨울날에도 오늘에도 똑같이 눈은 내리건만 마음이 흔들리니 설경은 제 각각이다. 그림은 사라지고 돌로 된 형상은 경주박물관에 있지만, 신라 경덕왕 때에 희명(希明)의 지극한 정성에 감읍하여 분황사 관음보살님은 천 개의 눈에서 하나를 덜어 장님이었던 그 딸의 눈을 밝혔다. 그래서인가 향가 「천수대비가」 가락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희명의 만 분의 일은 하자며 보광전으로 가서 108배를 하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스님이 차나 한잔 하라며 이끈다. 문을 나서니 눈은 계속 내리는데 웬 중이 다 헤진 장삼을 입고 기다란 지팡이를 들고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어떤 미친놈이 낙승(落僧)을 보러 온 게야?”라고 외친다. “눈이 펄펄 내리기에 소생의 머리가 홱 하고 돌아 낙승이란 작자하고 곡차나 한잔 하러 왔습지요”라고 답했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실은 자신이 촛불 때 정원 스님이 소신공양(분신자살)하는 것을 보고 극락정토에서 땡중으로 환생한 원효란다. 법거량 삼아 질문을 해보니 원효가 맞아 절을 올리니, 술은 자신이 살 터이니 차를 사란다.

▲ 원효대사 표준영정(좌)과 경주 분황사에 위치한 영정(우)  


2. 다실에서 화쟁을 묻다

이도흠 (다향을 함뿍 들이키며) 신라 당대에서도 오랫동안 원효 스님을 무시했는데, 화쟁(和諍)이란 말이 요새 유행어가 되어 기쁘시지요?
(주장자를 들어 쾅 하고 내리치며) 기쁘긴, 화가 나!

이도흠 왜요?
불교만 연구한 학자들이 아직도 화쟁을 잘 몰라. 그러니, 이를 이용하는 이들도 왜곡하고 있어. 유신 시대 때 화쟁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독재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활용할 때는 분노가 치밀었어. 그보다는 나은 것이지만, 최근에는 한 교수가 화쟁을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는 개시개비(皆是皆非)”로 해석하였고, 종단은 이 논리를 따라 화쟁위원회를 운영했어. 『장아함경』이나 『우다나경』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가 나오지?

이도흠 네, 부처님께서 사성제(四聖諦)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푸타(Nigantha Nataputta) 등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주장들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 만지고서 각기 ‘언덕 같다, 기둥 같다, 밧줄 같다’라고 말하며 서로 싸우는 장님과 같음을 말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활용한 거 아닌가요?
맞아. 그런데 나는 이를 그대로 끌고 오되 이분법으로 이편저편을 극명하게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화쟁의 논리로 뒤엎어서, 누구든 코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옳지만[皆是],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보지 못한 채 부분을 전체로 오인하고 있으니 그르다[皆非]고 말하였지. 한 교수는 이를 근거로 화쟁의 핵심이 바로 개시개비이니,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할 수 있다며 이를 4대강, 강정마을 등 한국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적용하자며 서로 경청하자고 주장하였어. 또 한 스님은 이에 부응하여 보수도 그래야 하지만 진보도 ‘진영의 감옥’에서 탈피하자며 4대강 문제 등에 정부 쪽과 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함께 불러서 회의를 열고 토론회를 하였고, 쌍용자동차와 같은 노동문제나 종단의 개혁에서도 이 방식을 고수하였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이도흠 하나도 해결된 것은 없고, 오히려 결과만 놓고 볼 때는 정부 쪽 손만 들어준 꼴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도흠 권력이 압도적으로 정권 쪽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를 대칭으로 만들지 않은 채 개시개비식으로 협상하라는 것은 정권 쪽의 알리바이만 강화해준 꼴이 되었다고 봅니다.
옳거니! 화쟁도 연기론의 하나야. 한 예를 들지. 군대에서 한 신병이 너무도 춥고 손이 시려서 차마 세수하지 못한 채 세숫대야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소대장이 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식당에 가서 온수를 달래라”라고 했어. 신병은 그렇게 했다가 고참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지. 다음 날 아침 인사계가 신병에게 “식당의 김 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온수를 달래서 가지고 와라”라고 시키고는 그리하자 신병에게 그 물로 세수하라고 일렀어. 소대장과 인사계 모두 신병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고 개시개비의 화쟁적 사고를 하였어. 하지만, 소대장이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고 신병의 실체만 보았다면, 인사계는 고참과 신병, 자신과 신병 사이의 연기관계, 특히 거기에 스민 권력을 파악하였기에 소대장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 게야. 대립물 사이에 놓인 조건과 인과관계, 거기에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무시하고 실체만 바라보고 개시개비하면, 관념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장에서는 화쟁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러기에 세월호든 노동문제든 이 문제를 화쟁으로 해결하려면, 양자가 놓인 조건을 파악하고, 먼저 대화의 장만큼은 권력이 대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바로 ‘공정한 화쟁’을 이루는 길이야. 특히, 정부가 많은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상황에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우선이야.

이도흠 그럼, 스님께서는 화쟁을 한마디로 뭐라 정의하시는지요?
불교학자들이 화쟁을 소통, 화해 등으로 정의하는데 이것도 서양의 실체론이나 이분법으로 화쟁을 바라본 거야. 한마디로 화쟁은 ‘대립물 사이의 연기적 깨우침에 따른 대대적(待對的) 전환’이야.

이도흠 대대(待對)가 무엇이죠?
사전적인 의미로는 대립물을 내 안에 모신다는 뜻이지. 지금 낮이야, 밤이야?

이도흠 아직 환하니 낮이지요.
(지팡이로 내 머리를 내리치며) 서양 사람들은 이 세계를 이데아와 그림자, 밤과 낮, 이성과 감성 식으로 A or not-A로 바라보고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처럼 A and not-A는 모순으로 인식하지. 이름하여 이분법적 모순율이 서양의 철학과 논리의 바탕이지. 하지만, 낮은 12시에서 0.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지점만 낮이야. 12시 1분이라 하더라도 밤이 이미 1분만큼 들어와 있어. 실제 세계는 밤인 동시에 낮이야. 파란 태극 안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팔을 펴는 양의 행위를 할 때 구부리려는 음이 작용하고, 반대로 팔을 구부릴 때 펴려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팔을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이야.

이도흠 이건 세계를 바라보는 틀에 관한 것이고, 대립물의 연기적 관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지요?
기술력만이 아니라 관리에서도 세계 최상위 기업인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7’을 단종까지 하면서 2조 원의 손실을 입은 까닭이 무엇이야?

이도흠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과 전기 용량을 늘리는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은 채 절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부피를 줄이면서도 전기용량을 늘리는 혁신적인 전기 축전 메커니즘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융착돌기를 비정상적으로 높여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절연띠와 갑 안에 두루마기 모양으로 말린 일명 ‘젤리롤’ 안의 분리막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여 음극판과 양극판이 만나 방전하면서 화재가 발생했지요.

▲ 분황사 설경(경주시 제공)     


맞아. 간단히 말하여, 화쟁이란 대립과 갈등, 딜레마, 모순[諍]을 직시하고 양자의 연기적 관계를 묘파하여 끊임없이 소통하다가 대대적 전환을 하여 하나로 아우르는 것[和]이야. 시민과 국가, 노동과 자본, 남과 북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한 채 쟁(諍)의 과정 없이 화(和)에 초점을 맞추면 유신체제를 옹호한 이데올로기나 분단모순을 은폐하고 독재체제를 옹호한 남북통일론처럼 ‘거짓 화해’로 귀결돼. 그렇다고 양자 사이의 소통이나 절충이 화쟁이 아니야.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 수억 원에 이르는 환경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비 오는 날 폐수를 몰래 버리는 재벌이 환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생각하였다가, 어느 날 자기 공장에서 버린 폐수를 먹고 자란 물고기를 자신의 자식이 먹고 기형아 손자를 낳을 수 있다고 깨닫고서는 정화장치를 설치하고 친환경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바로 화쟁이야. 둘 사이의 연기적 관계를 깨닫고 서로를 내 안에 모시는 작업을 꾸준히 하여서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이지.

이도흠 이제 조금 이해가 갑니다. 화쟁의 방편을 통하여 당시까지 존재했던 불교의 대립과 딜레마를 해결한 것이네요.
그렇지. 반야와 유식의 대립을 불일불이(不一不二)로, 언어와 진여(眞如)의 딜레마를 선령언구 후령의리(先領言句 後領義理)론으로, 부처/깨달음과 중생/깨닫지 못함의 대립을 진속불이(眞俗不二)로 화쟁을 하고, 사(事)와 이(理) 등 그 밖의 대립과 모순에 대해서도 순이불순(順而不順)이나 변동어이(辨同於異)를 통하여 하나로 회통(會通)을 한 것이지.


이도흠 아둔한 중생을 위하여 조금 더 쉽게 풀어주시지요.
(장삼 자락에서 사과를 꺼내며) 이게 무엇인가?

이도흠 사과이지요.
누가 사과를 발로 밟아 짓뭉개면, 더 나아가 각각의 원소로 분해하면 사과인가?

이도흠 아니지요.
반야는 모든 것이 공(空)이라며 존재를 부정하고 유식은 그 반대야. 사과는 사과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온도와 빛, 영양분 등 모든 조건이 맞아서 이런 저런 원소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결합체에 지나지 않기에 공이지.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니 하나가 아니지[不一]. 국광 종의 사과 씨는 육질이 단단하고 당도는 덜한 사과를 맺고, 후지 종의 사과 열매는 육질은 덜 단단하지만 당도는 높은 성질을 가진 사과 씨를 품으니 둘도 아니야[不二]. 사과와 사과 씨 모두 상대방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금세 변하니 공(空)이야. 하지만, 씨가 땅에 떨어져 자신을 썩히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자기 몸을 던지면 씨를 남기지. 이처럼, 공(空)이 연기적 관계 속에서 생성하고 변화하는 조건을 형성해.

이도흠 하!
(커피를 마시면서 내 눈을 직시하며) 자네, 누구인가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이도흠 (자신 있는 눈빛으로) 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왜 그렇지?

이도흠 진정한 사랑이 100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말을 모아 표현해도 90 정도밖에 안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옳거니! 그처럼 궁극적 진리는 언어를 떠나 있어.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지극한 선정(禪定)을 통해서만 그 경지, 곧 부처님의 마음, 일심(一心), 진여(眞如)에 이를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자네가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 내내 입을 닫고 서 있다면 학생들은 의아해하겠지. 중생들은 언어 없이 진리에 다가가기 어려워. 그래서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사다리를 이용해 지붕에 오르는 것처럼 언어를 방편으로 이용하여 지붕인 궁극적 진리에 다다르는 방편을 세운 것이야. “당신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상투적인 언어인 문어(文語)는 세계를 왜곡하지만, 김수영이나 이상의 시를 통해서는 새로운 세계에 다가가는 것처럼 의어(義語)를 통해 궁극적 진리에 한 자락 다가갈 수는 있어. 하지만, 사다리에서 내려야 지붕에 이르듯, 언어는 방편일 뿐이야 언어를 떠나 진여실제(眞如實際)로 가야 해.

이도흠 (눈을 반짝이며) 그럼, 진속불이는요?
저 창을 봐. 먼지가 잔뜩 앉아 있으니, 오늘처럼 눈 내리지 않고 맑은 날이더라도 하늘이 부옇게 보이지. 먼지만 닦아내면 파란 하늘이 드러나듯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이 모든 어리석음과 번뇌의 근원인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면 부처가 된다네. 하지만, 부처가 되었더라도 고통 속에 있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다시 중생으로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하여 그를 부처로 만드는 순간에 나도 진정으로 부처가 되는 게야.

이도흠 그럼, 순이불순(順而不順)은 절로 이해가 됩니다.
설명해 보게.


이도흠 어떤 것을 진리라 하여 전적으로 믿으면 도그마가 되고, 어떤 것을 허위라 하고 내치면 그에 담겨 있는 일말의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또, 진리도 다른 맥락에서는 허위가 되고 허위 또한 다른 맥락에서는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허위라 해도 그 가운데 진리인 점과 그것이 진리로 변할 수 있는 점을 잘 살펴서 따르고, 어떤 것이 진리라 해도 허위인 점과 허위로 변할 수 있는 점을 잘 살펴서 따르지 말라 그것이죠?
옳거니! 이제 술이 고파지네.


3. 술집에서 촛불과 통일을 논하다

이도흠 (중동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다가는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키며) 요새 전 세계적으로 갈등과 전쟁, 학살이 점증하고 있어 걱정입니다.
‘주술의 정원’인 야만적인 중세 시대라면 몰라도, 대중들이 교양을 갖추고 이성을 확립하고 인권이 보편적인 원칙으로 자리 잡은 현대에 왜 대량학살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


이도흠 한나 아렌트란 학자는 평범하고 충직하였지만 유태인 대학살을 자행한 아이히만처럼 대중들이 ‘순전한 생각없음’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 하고, 스탠리 밀그램은 대중들이 권력의 권위에 복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피상적인 이유야. 아이히만에게 독일 중산층 우파 시민을 학살하라고 했어도 아무런 생각 없이 행하였을까?

이도흠 그러지는 못하였겠지요.
나는 동일성 때문이라고 봐. 동일성은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속성이 있어. 그 근거로 대량학살 이전에는 상대방을 타자화하는 혐오발언(hate speech)이 먼저 행해져. 나치도 유태인을 유럽 정신을 훼손하는 이교도, 빨갱이 등으로 매도하는 발언을 5년 전부터 행했어. 백인 아이는 때리지도 못하는 선교사가 잉카나 마야의 아기는 별 죄책감 없이 죽였지.

이도흠 화쟁에 대안은 없는지요?
화쟁 가운데 변동어이(辨同於異)가 그 대안인데, 쉽게 설명하면 눈부처의 차이야.

이도흠 그게 무엇이지요?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면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보여. 형상이 부처님과 비슷해서 우리 조상들이 ‘눈부처’라고 붙였는데, 난 여기에 크게 세 가지 의미를 덧붙이지. 눈부처란 ‘주/객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대대(待對)’야. 우선 상대방의 몸인데 내가 있어. 그리고 상대방의 눈부처를 보는 순간에 내 눈동자에도 상대방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지. 이를 서로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너와 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상대방을 내 안에 서로 모시는 대대적 관계를 형성해. 둘째, ‘내 안의 불성(佛性)과 타인 안의 불성의 서로 드러남’이야. 설혹 상대방을 때리러 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보는 순간 멈출 수밖에 없지. 이처럼 눈부처는 내 안에 타인과 공존하고 섬기려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야. 셋째, ‘동일성에 포획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야.

이도흠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없는지요?
이해하기 쉽게 허구적인 소설로 풀어 설명하면, 어떤 이가 대학교 때 누이가 독일로 간호사로 가서 보내주는 돈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어느 날 누이가 독일 의사한테 성폭행을 당해서 자살했어. 그래서 그가 대학을 중퇴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에 올라, 고유명사 ‘독일 의사’뿐만 아니라 보통명사 독일 의사도 되지 않기 위해서 고용인 백 명 가운데 오십 명을 이주노동자로 쓰고, 그들과 저녁도 같이 자주 먹고, 축구도 같이 하는 등 가족처럼 대해주어 그들도 그를 사장님 대신 형님이나 오라버니라고 불렀어. 그런데 어느 날 사장의 아들이 와서 아빠야말로 독일 의사라고 말하고는 집을 나가버렸어. 왜 그랬겠어? 그 아들이 회사 노동자 가운데 흑인 여성 이주 노동자를 데려와 결혼한다고 했더니, 사장이 그 아이를 딸처럼 대해주었지만, 유학자의 자손으로서, 검은 피부를 가진 손자가 조상님의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야.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사장은 밤새워 성찰하며, ‘내 안의 독일 의사’를 발견했겠지.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해서 아들과 그 여성과 소풍을 가서 나, 내 안의 독일 의사, 그리고 흑인 여성 이주노동자, 이주 노동자 안에 있는 내 누이, 이 네 자아가 하나가 되는 게 ‘눈부처 차이’야.

이도흠 중동과 서양 사람 모두가 코란에 성경의 가르침과 통하는 것이 8할이 넘고 성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중동에서 테러와 전쟁, 학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겠네요. 남북통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가요?
난 남북의 통일이 7단계-① 남북의 통일을 위한 최소 합의 ② 핵과 맞바꾸는 평화협정 체결 ③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규제 없는 전면적 교류와 협력(사람, 정보, 물류의 자유 이동) ④ 화쟁코리아 ⑤ 남북의 국가연합 ⑥ 낮은 단계의 연방제 ⑦ 완전한 통일국가-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 중 넷째 화쟁코리아 단계란 북한에 자본주의 정당과 자본주의 마을, 남한에 공산당과 공산주의 마을을 세우고 남북한 통합 역사와 문학, 철학을 공동의 교과서로 가르치며 연인처럼 서로를 닮아가며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종합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이지.

이도흠 촛불은요?
내가 정원 스님 소신공양 이후 죽 지켜보았는데, 아직은 항쟁이야. 민주주의는 왕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왕이 되는 것이야. 적폐도 청산되지 않았지만, 권력-자본-종교권력층-보수언론-전문가 집단 및 어용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지배카르텔은 전혀 균열되지 않았어. 주권자로 인식하여 광장으로 나서서 대통령을 몰아냈지만, 권력을 새로운 정권에 위임해버린 채 정치적 주체로서 조직되지는 않았어. 하지만, 희망이 있어.

이도흠 어떤?
이제 국가도, 대통령도 두려워하지 않는 눈부처-주체들이 여기저기서 형성되고 있어. 눈부처-주체는 한 마디로 자기 앞의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에 비판하고 저항하는 근대적 주체이자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서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고 연대하는 탈근대적 주체들이야. 눈부처-주체는 세 가지 자유, 곧 소극적 자유(freedom from), 적극적 자유(freedom to), 대자적 자유(freedom for)를 종합하여 구현하는 자야. 소극적 자유는 모든 구속과 억압, 어리석음, 탐욕에서 벗어나 외부의 장애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생명으로서 생의 환희를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누리면서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고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것을 의미해. 적극적 자유는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모든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세계를 자신의 의지와 목적대로 개조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뜻하지. 노동과 실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수행과 신행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룰 때 도달하는 희열감의 상태가 바로 이 경지야. 대자적 자유는 자신이 타자와 사회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여 나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해. 앞으로 눈부처 주체들이 공론장으로서 광장을 만들고 더 나아가 ‘눈부처-주체들의 자유로운 연합’으로 이루어진 코뮌들이 곳곳에 세워져 화쟁의 꽃밭을 이룰 것이야.

이도흠 저도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한 후 떨어진 젓가락을 집으려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보니, 원효가 있던 자리엔 지팡이만 남아 있다. 밖으로 달려 나가니, 함박눈이 흩날리고 쌓여서 하늘과 땅의 구분조차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