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지워지지 않을 것들 

 일본은 내게 참 익숙한 여행지다. 익숙하다는 표현보단 질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해외문학기행이 무려 아홉 번째 일본 여행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2월 중에는 미리 계획해뒀던 7박 8일 가족 일본 여행도 있어서, 기행지가 일본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솔직히 실망했다. 이번 달에 열 번 찍고 다시는 안 가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또 가게 될 것 같다.

1.두 개의 눈부심
 삿포로에서 3일을 보내고 도쿄로 이동해 4일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그간 여덟 번의 일본 여행 동안 삿포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도쿄도 짧게 둘러본 게 다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러본 두 도시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눈부셨다. 삿포로는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눈의 고장이었다. 끊이지 않고 내리는 눈이 집, 나무, 길의 경계선을 모두 지우고 완벽한 백색을 이뤄 마치 흰 하나의 광원을 보는 듯했다. 반면 도쿄는 모든 게 선명했다. 특히 하늘이 정말 푸르러서,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내 손을 자꾸 들어 올렸다. 건물이나 간판에 원색을 많이 써서일까, 크레파스로 힘을 줘 채색한 컬러링 북을 보는 것 같았다. 선명하게 빛나는 걸 보면 눈에 잔상이 남는 법이니까, 두 상반된 풍경을 눈앞에서 지우기에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다.

2. 선물할 기회

 여행을 다니며 내가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로 알았다. 누군가를 먼저 떠올리고 선물할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무언갈 보고 그걸 좋아하는 누군갈 떠올려 사 가는 식이다. 그래서 선물은 많이 샀지만 골고루 나눠주지는 못한다. 친하지만 선물을 한 개도 못 산 친구도 있고, 두세 개씩 산 친구도 있다. 평소 뭘 좋아하는지 많이 말해준 친구일수록 더 자주 떠오르니까 말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당당하지 못한 편이다. 그래서 뭘 좋아하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함을 넘어 고맙게까지 느껴진다. 여행 중 만난 고마운 사람이 한 명 있다. 도쿄 타워에서 만난 나나하라는 이름의 네 살 어린이다. 사교성 좋고 활발했던 나나하는 다행히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내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잔뜩 이야기해줬다. 지금 내 메모장에는 나나하가 이야기해준 것들이 잔뜩 적혀 있다. 롤러코스터(타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스밋코구라시, 우주선, 우주인, 로봇, 이어링, 별. 언젠가 이것들이 모두 나오는 동화를 쓰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걸 당당히 말했으면 좋겠다. 내게 선물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할 테니.

3. 생각보다 문학기행

 우리는 생각보다 문학적인 대화를 했다. 매일 약 이만 보씩 걷고 녹초가 되어서도 우리는 밤마다 모여 이야기를 나눴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새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부족함에 대한 걱정을 나눴고, 서로의 글에 대해 끝없이 궁금해했고, 좋게 본 영화와 책과 작가를 소개했다. 한참 글에 대해 말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담당자님 앞에서 해야 하는데,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곳이라서, 이 사람들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원 없이 했다. 함께 글을 좋아하고 두려워하고 기대하고 생각한 모든 시간들이 즐거웠다. 그래서 문학기행은 생각보다 더 문학기행이었다. 나는 쓰고 싶어졌다.

 
 무엇이든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렸을 적 읽었던 책도, 갔다 온 여행도, 학창 시절 추억도. 다 같이 옛날이야기를 할 때 잘 끼지 못하고 듣기만 하는 일이 많기도 하다. 이 해외문학기행도 아마 전부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나가고 잊힌 시간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이 일주일이 내게 새긴 선명한 감각들과 용기, 쓰고 싶은 마음은 언제까지고 내 몸 안에 남아 나를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