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낯선 시간이 준 커다란 위로 -나의 '박재형'에게 보냅니다.
글쓴이 : 문정연
날짜 : 12.03.07|조회 : 7020
축축한 히드로 공항의 첫 공기는 참으로 설레었습니다. 영국에서의 그 며칠은 어둑한 새벽녘에 시작되고 또 그만큼 어둑한 밤나절에 끝나곤 했어요.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까. 노래 한 소절로 당당히 구걸하는 남자들이 사는 오래된 지하철과 벽돌길의 커브를 돌면 또 이어지는 벽돌길의 거리, 우리라면 모두다 기념 건축물일 멋진 모양 속에 들어찬 가정집들, 머리가 천장에 닿는 높은 층까지도 관객이 들어차는 극장과 키높이 구두를 신지 않아도 껑충하게 큰 사람들, 그들의 너무 높고 붉은 코, 그 코와 섞여 사는 다른 눈색깔의 인도 사람들...... 그 모든 풍경들과 부딪히느라 난 삐걱이는 침대에서도 곯아떨어지곤 했어요.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내 현실 속에 떨어진 모든 것이 너무 거대하게 낯설어서, 화장실 변기마저도 다리를 달랑거릴 만큼 높고 낯설어서, 그리고 그 예의도, 조금만 몸을 부딪혀도 'sorry'를 연발하는 그 예의, 우리가 지하철에 앉으면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호기심 어린 눈길, 그래서 이 곳에선 내가 아주 낯선 얼굴임을 일깨워주던 그 눈길이 너무 낯설어서 난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난 당신과 다른 차원에 있었어요. 이 곳이라면 당신과 당신에 대한 기억 모두, 없었던 일로 쳐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죠.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니, 미안하지만 난 당장 내 앞에 떨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벅차서 당신을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외롭지 않았고 정말 오랜만에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서 당신의 뒷모습을 기억해 온 그 겨울 이후, 처음으로 나는 당신으로부터 솔직하게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한테는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당신은 절대 모르겠죠. 아니... 어떻다 해도 당신에겐 이미 상관없는 일인가요. 낯선 서양 남자가 보내는 찡긋거리는 눈길의 반만큼도 당신은 내게 나눠 줄 눈길이 없을테니까요.
프랑스는 덜 예의 발라서 좋았죠. 영국 사람들이 보여준 매너가 나는 조금 불편하고 답답했거든요. 빨간 불인 건널목을 건너는 우리에게 솔직하게 불평을 털어놓는 운전기사들이 나는 웬지 더 편했습니다. 프랑스가 그들 나름대로 철저하고 엄격한 치안에 신경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거리의 쓰레기통이 투명한 비닐봉투인 것도 폭발물 방지를 위해서라더군요. 괜히, 우파 정권 때문일까, 알고 있는 유일하고 단편적인 정보를 꺼내 보기도 했죠. 내가 당신에게 조스팽 얘기로 아는 체 했던 기억이 잠깐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 다소곳이 앉아서 구걸하는 인형같은 얼굴의 집시들이 생각납니다. 그들도 지나가는 우리를 구경하는 표정이더군요. 하지만 그들에겐 나를 만난 그 날이 늘상 같은 표정의 하루였을 뿐이겠죠. ... 여행이 계속되면서 조금씩 긴장이 풀렸나 봐요. 이젠 늘 보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리 한 짝이 잘린 비둘기와 온 파리 시내에 붙어 미아를 찾는 광고,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지 않은 누런 변기물, 창틀에 끼워놓은 쓰레기, 천천히 걷는 노인들과 관광지에서 흥분하는 아이들, 숨을 헉헉거리는 조깅족... 낯선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알고 보니 참 낯익은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세느강변을 걷는 연인들의 모습만큼 낯익은 것은 없었죠. 어김없이 당신 생각이 나더군요. 아팠습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오래 미워해서 손을 잡은 우리를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그토록 많은 사랑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모질게 질척대는 나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많은 사랑 중에 하나쯤은 가질 수 있겠죠. 받아들이려 했지만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동안엔 그럴 수 없었던, 유행가 가사 같은 진리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느 미술관에선 우리가 지하철에서 함께 봤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어요. 유럽 곳곳에서 이런 전시회가 특별히 뻑적지근할 것도 없이 열리고 있었죠. 처음으로 유럽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이런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내 자신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갑자기 당신을 집요하게 기억하는 옹졸한 내가 창피해졌어요. 난 어쩜 그렇게 빙신같은 걸 알면서도 빙신같은 짓을 계속 하고 있는 걸까요.
부끄러운 건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더 깊어졌지요. 파리와 독일 본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한국 문학을 번역하는 분들을 만났거든요. 이 분들을 만나서 우리가 분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나라가 국제 사회에 아주 조금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됐습니다. 이 분들은 단지 좋아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것뿐인데, 우습게도 공부만 할 수가 없고 독한 마음으로 '싸우기도' 해야 하더군요. 한국학의 저변을 넓히고 한국을 알리는 것 자체가 한국에 대한 수많은 편견들과 싸우는 과정이었던 거죠. 그 분들의 진지함과 순수함 앞에서 내 질척거림은, 시끄럽고 열광적인 하루 짜리 애국심만큼이나 이기적이고 편리한 것이었어요. 그냥 그 분들이 있는 그대로 숭고해 보여서 내 자신은 왜 그렇게 비겁하고 부끄럽던지... 어른이 되어 한국어를 배우는 해외 입양아들과 마주 앉은 불편함 또한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어요. 왜 나는 그들에게 책임질 수 없는 미안함을 느껴야 했던 걸까요. 우리와 함께 앉은 자리에서 그네들은 어쩜 그렇게 편안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순진한 감상을 회고하는 것이 그들에겐 또다른 폭력일까요. 여전히 답을 얻을 수 없는 이 질문들은 내 안에 가득 찼던 당신을 한 켠으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아주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난 좀더 명랑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당신은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당신이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없이 자랐다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당신이 알든 모르든 나조차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시간이 이렇게 정당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부끄러움은 이번 여행이 내게 남긴 가장 소중한 기억이지요. 그분들이 보고 싶네요. 후베 선생님, 한유미 선생님, 이병주 선생님두요. 그리고, 그 친구들도. 당신을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새삼스럽습니다.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보고싶어하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네요.
프랑크푸르트 역 앞에 자리 잡은 우리 호텔 베란다에서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저들은 도대체 무슨 열정에 사로잡힌 걸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들떠서 행인들을 힐끗거렸고, 뭔가 정당하지 않은 거래를 하는 듯 했고, 끊임없이 마리화나를 피워대면서 밤이면 이불에 칭칭 감긴 채 노숙을 하고 싸우고 고함 지르다가도 햇빛이 쨍쨍한 낮이면 어김없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쓸쓸한 풍경이었어요. 하지만 그네들은 뭐, 그네들 나름대로 사는 모습이 있는 거겠죠. 방으로 들어갈 때면 언제나 우리 친구들이 또 어떤 화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 방에는 알콜 중독이 의심되는 착한 시인과 거울을 보는 모습이 어울리는 합리적인 평론가, 커다란 눈에 세심하고 힘겨운 인내를 담고있던 내 어린 후배 소설가와 이 여행의 책임을 홀로 어깨에 진 재미있는 선생님 한 분이 있었죠. 나는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여행이 다시는 없을 특별한 형태의 시간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어야 하는 시간.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되리라는 것도 잘들 알고 있었어요. 우린 서로를 배려했고 서로를 조금씩만 드러냈어요. 그런 모습이 아마도 그 시간엔 가장 솔직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당신 외에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내게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그렇게 여행은 마치 일상처럼 느리고 성실하게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그 시간에 익숙해져서 이렇게 느릿느릿 아무런 약속에도 쫓기지 않고 아무런 감정에도 얽히지 않고 늘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가슴 미어지게 했지요. 다시 비행기를 타야하는 그 정해진 막바지까지 말입니다.
문득 두려워졌어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당신을 이렇게 편안하게 여길 수 있을까. 하루의 내 생각 백 개 중에 다섯 개 정도만 당신 생각일 수 있을까. 난 자신이 없어서 호텔의 이부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었죠.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고 내 두려움은 커다란 TV화면에 꽉 찬 대구 지하철 화재 소식으로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옆자리의 체코 아저씨는 연신 10년 전에 방문했던 한국이 아름다웠다며 웃는데, 난 저런 걸 종일 내보내는 사람들에게 슬그머니 화가 났고 한국말을 하는 순간이 묘하게 신경 쓰였죠. ... 그때쯤 뭘 하고 있었나요? 난 바로 그때쯤 이 곳에 돌아왔는데... 그날은 졸업식 날이었어요. 여러 가지 아쉬운 기분에 나는 온통 허전하고 스산했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 낮이었던 어둑한 밤에 참 오랜만에 누워본 내 방에서 생각했죠. 그 보름 새 개업한 동네 화장품 가게 때문인지, 이젠 '이 곳이 낯설다'고. 기분 좋게도, 난 똑같은 곳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어요. 내가 누운 방바닥은 당신으로 가득 찼던 그 곳이 아니었죠. 낯설고 먼 이 여행이 끝난 후,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런 거였어요. 그래, 사는 것도 여행하듯이 그렇게 견뎌내면 되겠구나, 아주 천천히 시간을 떠나보내고, 깊이 달라지고, 그러다 어느 날은 훌쩍 사라지는, 삶이란 그런 거겠구나...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정말 다양한 가치들이 있었죠. 난 내가 선택한 어떤 삶의 방식에도, 나를 선택한 어떤 가치에도 얽매이거나 짓눌릴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젠 당신을 붙잡고 있는 나를 풀어주고 싶었어요. 그 동안 참 많이 애썼다고 머리도 한 번 쓰다듬어 줬죠. 사랑이 원래 그렇다는 걸 잘 알면서도 솔직했던 당신을 너무 오랫동안, 너무 깊이 미워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유난하게 높낮이를 타는 우리 삶의 흐름을 당신도 나도 거역할 순 없었던 거잖아요. 이제 다시는 당신이 내 분노 속에 침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도 지금의 나만큼 행복하기를 바래요.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구요.
지난 특별한 시간 속에 함께 있었던 영오씨, 은미씨, 애란이에게 고맙습니다. 전성우 선생님께 가장 고마운데, 그런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이런 것 말고는 없네요. 전 요즘 졸업하고 진정한 백수로 사느라 무척이나 바쁘지만, 아주 가끔은 귓속 가득 들어차던 하워드의 바람 속에 서 있곤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사는 일에 자신이 생기고 내 주변 반경 10km는 즐거운 기운으로 가득 차오르지요. 어쩌다 내 생활에 그런 행운이 왔던 걸까요.
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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