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일본문학기행문
글쓴이 : 박경아
날짜 : 12.03.07|조회 : 7085
일본은 천천히 걷기에 꽤 어울리는 나라라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깨끗하고 정갈한 거리, 조용하고 상냥하며 끊임없이 미소짓는 사람들. 9박 10일 동안 많은 곳을 다녔다. 대부분의 해외여행이 그렇겠지만 일정은 매우 빡빡했고 들뜬 마음은 분주함에 정신이 없었다.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지나치게 욕심부리며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렸다. 우리 것과 견주면서 대단한 자부심과 사소한 열등감 사이에서 고민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떤 감흥을 얻어야 하는지 스스로를 재촉하고 싶지도 않았다. 억지스런 감동이나 배움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기행문에서도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신선함을 불러 일으켜준 몇 개의 여정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려 한다.
청수사(淸水寺)는 꽤 높은 곳에 있는 절이었다. 산 속에 있는 절이었는데 올라가는 길을 보아하니 관광지로 유명한 듯 했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이 절에는 손잡이가 매우 긴 바가지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는 약수터가 있었다. 그래서 청수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절을 찾은 사람들은 이 신기한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마시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이 절의 명물은 다른 것에 있었다. 100엔 정도를 내고 부처님 뱃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자 곧 어둠만 가득한 통로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깜깜했던지 계속해서 절벽을 걷는 듯 앞발을 내딛기가 무서웠다. 재미있겠다고 앞장 선 나의 호들갑이 후회스러웠다. 일직선의 통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두려움은 갈수록 커졌다. 이게 부처님 뱃속이란 말인가. 깜깜함이 전부인 이것이 부처님 뱃속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밀도 높은 어둠이 오히려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완벽히 어둡기에 편안할 수 있다는 생각. 작은 빛이라도 있어서 뭔가 보였더라면 그것으로 인해 더 어둠이 무섭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완벽한 어둠은 정직한 무지로 겸허함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을 때, 아, 나는, 인간은 참으로 무지한 존재구나. 다만 용맹정진 해야할 뿐. 하는 작은 빛을 느낄 수 있었다. 부처님 뱃속에 있는 것이라곤 까마득한 깜깜함 뿐이었다.
니조성은 봉건제 시대의 성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목조건물로 우리 나라의 고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매우 특이한 것이 있었다. 걸을 때마다 마루에서 휘파람새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심해서 걸어도 여지없이 마루에서는 휘파람새 소리가 새어나왔다. 알고 보니 휘파람새 소리는 봉건제 시대의 특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기술 중의 하나였다. 봉건제 시대의 군주들은 모두 무사였다. 그들은 싸움으로 영토를 뺏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했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불안한 날들을 보내야 했던 그들은 아무리 조심히 걷더라도 발걸음 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휘파람새 소리가 나는 기술을 만든 것이다. 건축 기술에도 역사의 한 단면이 스며있는 것 같아 새삼 놀랍고 재미있기도 했다. 절대왕권이 존재했던 우리 나라와는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호시노 도모유끼 씨를 만나면서 내가 정말로 관광이 아닌 문학기행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수상자 모두가 그때만큼은 너무나도 순진한 문학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처음 글을 배우는 초등학생처럼 결연한 태도로 두 시간 정도의 예정된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매우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호시노 도모유끼 씨는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야 했다. 그의 책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를 미리 읽고 갔기에 그에 대한 환상도 더 있었던 것 같았다. 문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하는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한일 역사 관계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에서 보여주던 문장의 아름다움이 대답을 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성실함과 진지함으로 드러났다. 또 작가란 어떤 양상이나 현상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에서 진실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문학을 별로 접하지도 않았지만 요즈음 일본 문학의 사소설 경향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약간은 가벼운, 스타일리스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꽤 진지하고 괜찮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작가라면 진지해야 하고 자기 작품에 욕심부릴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층이나 되는 높은 곳에서 간담회를 가져서 그런지 그 날의 간담회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설국문학관 주위는 정말 엄청난 눈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눈이 많이 녹은 상태라고 했는데 나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만설(滿雪)이었다. 어째서 설국의 배경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설국문학관에 가기 며칠 전에 우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을 이미 들른 상태였다. 일본에서 배울 만한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기념관 문화였다. 스스로 소중하고 자랑스럽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잘 정리해서 기념관을 만들어 놓는 모습이 매우 좋아 보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막상 작가들의 생가(生家)나 기념관을 가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관리도 소홀하지만 작가에 대한 소개도 미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국문학관 외에도 가마쿠라 문학관과 시가나오야라는 작가의 생가에도 가보았는데 그때마다 정성스런 관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팜플렛을 만들어 작가와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있었다. 여러 곳의 문학관을 들를 때마다 부러움과 동시에 나의 먼 훗날에 대해서도 다짐하게 하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이번 일본여행은 태어나서 처음 하는 해외여행이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깊다는 것, 작가라는 것은 꽤 해볼만한 일이라는 것. 일본의 풍물이나 특유의 어떤 것들을 보고 느꼈다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호시노 도모유끼씨를 만났던 호텔의 한 벽면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부러 그 유리벽에 발을 바짝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했다. 이 유리벽이 없다면, 한 발만 더 내딛는다면. 그 도저한 상상이 아찔하면서도 즐거웠다. 한 번쯤 처참히 깨져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처참히 깨진 나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어쩐지 나는 더욱 글이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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