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일본문학기행문
글쓴이 : 이종호 날짜 : 12.03.07|조회 : 8054



1.
 '日本'이라는 곳은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 곳일까. 인천국제공항에서 오사카 간사이 行 항공기에 오르기까지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었다. 일본이라고 발음을 할 때,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환영처럼 덧씌워진 '역사적'이라는 어떤 상처 때문이었을까. 한국의 근·현대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냥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긴 했다. 이는 아마도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보여 주었던 그들의 모습과, 오늘날 아시아권에서 자본주의 국가로서 가지고 있는 위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대가 빚어내는 묘한 긴장감이 내내 온몸의 여기저기를 들쑤시게 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 열강들에 의한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던 시점에서 서로의 운명이 갈라지기 시작했던 한·일 양국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정책. 이렇듯 한국과 일본(좀더 나아가서는 일본과 아시아)은 다소 무겁고 엄숙하고도 비장한 과거 역사의 관계로 말미암아 복잡다단한 감정 및 관계가 뒤엉켜 있다고 생각한다. 점차 옅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상처와 감정은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곤 하니까 말이다.
과거에 '나'라면, 아무래도 이러한 한·일 혹은 일·한 관계에 시야와 생각이 갇혀 어떤 불편함과 민족적 정서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어느 무렵만 하더라도 민족적 정체성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을 탈각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 덕택에, 나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고, 따라서 과거보다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레 옮아갈 수 있었다. 민족적 정체성의 탈각은 이내 곧 어떤 국가주의나 국적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나는 한민족이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노력과 더불어 이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짓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내가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현재의 일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현재라는 것은 결코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닫힌 시공간이 아니라 일정정도의 연속성 속에서 형성된 시공간일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모습을 이 땅의 모습과 비교해 봄으로써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작은 실마리를 잡아보고자 했다. 아시아에서 성공적인 근대와 자본주의적 발전을 경험했다는 일본을 목격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가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들과 긴장 속에서 일본 문학기행을 위한 준비는 진행되었고 2003년 2월 5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오사카 간사이 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국외 여행이 처음인 나에게 있어, 출국절차 심사과정은 꽤나 복잡하고 지루한 절차였다(인솔자로 동행하신 김효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힘든 난관에 부딪칠 뻔했는지도 모른다). 다소 긴 시간의 출국절차와 심사과정을 거쳐 올라선 항공기에서는 낯선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동이라는 묘한 설렘이 앞서기도 했다.
20세기 초 이 땅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해탄을 직접 건너 일본 땅을 밟지 못하는 것이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과거의 그들이 현해탄을 건너면서 느꼈을 적잖은 설렘과 긴장감이 나를 압도해 왔다.
오후 늦은 비행기로 인해 창문너머의 풍경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 무언가를 식별하기에는 어려웠다.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야경은 어둠과, 오렌지 빛 불빛으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들과 어둠이 대조를 이루면서 만들어 내는 풍경은 어떤 연결망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마도, 네트의 세계를 시각화시키면, 그러한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두 시간 정도 기내에서 겪었던 설렘과 긴장 속에서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비행기는 일본 오사카 간사이로 우리 일행을 옮겨 놓았다. 일본 내국인과 외국인들 사이에 섞여 발을 내딛은 일본의 첫 인상은 서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9박 10일간의 일본문학기행은 시작되었다.
2.
일본은 전철과 기차, 지하철로 미세하게 이어져 있는 '철도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근대화와 문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철도와 철도망이 이내 눈앞에 들어왔다. 비교적 '성공적인 근대화'(이러한 표현이 가능할지는 의문이지만)를 거친 나라답게, 이방인이 보기에는 그들에게 철로는 완벽해 보였고 탄성을 자아내기에 흥분했다.
국철과 사철이 어우러진 철도망은 일본의 전 국토를 거미줄과 같이 이어놓고 있는 듯 했다. 다양한 등급의 전철과 고속철의 신칸센, 그리고 지하철은 일본의 근대 성취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스템 자체는 서울의 지하철, 전철과 유사했지만, 그 규모와 복잡성은 서울의 철도망을 훨씬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탄성은 일본 철도망에 대한 어떤 부러움과 선망의 표현은 아니었다. 일본의 철도 역사에 관하여 잘은 모르지만, 몇 해 전에 국내에서 상영되었던 일본영화 〈철도원〉이 장면장면들이 오버랩 되면서 여러 정리되지 않은 단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아둔한 기억력에 의존할 때, 〈철도원〉에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주인공의 어떤 행위보다는 일본 戰後시기에 자본주의화, 근대화에서 철도가 담당했던 역동성의 역할이었던 것 같다. 그 영화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전후 일본이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경제 성장과 성공적(?) 자본주의화를 이루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였다. 아마도 일본의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있어서 철도는 압도적인 위치와 지위를 담당했을 것이다. 잘 정비되고, 체계화된 그들의 철도망은 오늘날의 일본을 사고하는데 큰 시사점이 될 듯 했다.
우리의 기행도 대부분이 철도망을 통해 이루어졌다. 간간히 버스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철도의 이용이 압도적이었다. 일본의 장거리 여행은 이 철도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우리의 첫 시작점은 교토였다. 마치 한국의 경주를 연상케 하는 그 지역은 古都답게 조용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우리가 숙소로 정한 이로하 여관은 일본 전통 숙박시설 특유의 아담하고 편안한 공간이었으며, 그 곳의 목욕시설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여장을 푼 우리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사흘에 걸쳐 교토, 오사카, 나라 등지를 방문했다. 우리의 주요 목적지와 기행의 코스는, 문학기행이라는 여행목적에 걸맞게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과 문화관련 주요 유적들이었다.
교토, 나라, 오사카라는 지명과, 그 지명에서 풍기는 이미지에서 연상할 수 있듯 그 지역들은 거리상으로는 다소 떨어져 있고, 뿜어내는 분위기는 달랐지만, 古都로서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다음과 같은 곳이었다.
[皇居, 同志社大學, 니조성, 西本願寺, 〈가와바타 야스나리〉문학기념관, 오사카성, 금각사, 은각사, 용안사, 헤이안신궁, 淸水寺, 興福寺, 東大寺, 春日大寺, 夫婦大國寺, <시가나오야>구저택, 호류사]
우리는 古都의 이러한 주요 역사적 유적과 문학관련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이러한 곳을 둘러보면서 들었던 느낌 중 하나는 일본의 건축과 문화 예술이 나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흔히 동북아 3국인, 중국, 한국, 일본 경우는 그 문화적 유사성으로 인해 동일한 문화권으로 분류하기 마련인데, 직접 이러한 유적을 보고나니, 여러 가지의 차이와 개별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본의 주요 城들은 과거 일본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중앙집권 체제가 일찍이 이루어진 한국과 달리 오랫동안 지방분권이 강하게 유지되었던 일본의 경우 지방도시 중심의 성과 성곽이 발달해 있었다. 산성 중심의 한국과 달리 주로 도심의 평지에 성이 건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이는 지방 영주의 권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지방분권중심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방영주간의 세력 다툼이 빈번했을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주요 성과, 성곽의 건축규모가 한국에 비해 큰 규모를 지니는 것은 쉽게 이해할 만 했다. 外城과 內城, 발달된 垓字 등은 '武'중심의 일본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주요 사찰의 경우 한국의 불교중심 사찰이라기보다는 일본의 토속신앙에 기반을 하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호류사 등의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잘 꾸며진 불상을 보기 힘들었다. 건축술 역시도 한국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방면의 짧은 지식으로 인해 뭐라고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규모면에서는 큰 반면 세련미와 정교함은 한국과 다소 차이가 있는 듯 했다. (이러한 서술이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님을 새삼 다시 밝혀둔다. 문화와 건축의 차이를 말하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성과 주요 사찰들은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들을 잘 갖추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이 많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어의 안내방송과 한국어로 된 안내 팜플렛이 인상적이었으며 관광객을 위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러한 성곽과 사찰을 방문하면서 우리는 입장권을 끊는 일이 많았는데, 입장권 하나하나에까지 독특한 디자인의 도안을 그려 넣은 세심함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는 일본 특유의 섬세함과 상술이 잘 어우러진 결과인 듯했다. 우리는 한 유적지를 방문하면서도 여러 번 입장권을 끊어야 했던 경우가 많았으며, 유적지 내 여러 문화재를 통해 각종 상업적인 행위들이 이루어짐을 목격할 수 있었다. 김치와 단무지를 추가주문을 하면 요금을 더 치루어야 하는 일본 고유의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 중, 문학과 관련된 직접적인 유적은 동지사 대학의 윤동주 시비와, 〈가와바타 야스나리〉문학 기념관, 그리고 〈시가 나오야〉구저택이었다.
동지사 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자체 제작한 윤동주와 시비와 관련한 팜플렛을 보고는 묘한 반가움이 앞섰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모습과 고뇌가 각인되어 있는 듯한 그의 시비를 보며, 잠시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 시비는 윤동주 시인의 친필로 쓴 서시가 힘차게 새겨져 있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다소 초라하게 한 쪽에 치우쳐져 있어서 찾는데 좀 애를 먹었으며, 그 규모에 약간 실망은 했지만, 時空을 넘어 전해지는 어떤 의미가 계속해서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는 『설국』의 저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기념관과 〈시가 나오야〉 구저택을 방문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설국』의 저자인 가야바타 야스나리는 익히 알던 인물이었지만, 시가 나오야의 경우 일본 문학사의 사정에 어두운 나에게는 다소 낯선 인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여러 문헌을 통해 시가 나오야가 일본 근대 문학의 중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는데, 문학 전공자로서 다소 부끄럽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주요 城과 고궁, 사찰, 문학관련 유적들은 각각 독특한 개별성을 지니고 있는듯해서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경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 했지만, 서로 연결지어 생각해 볼 때에는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즉, 이러한 주요 유적들은 近代日本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막부 시대까지만 해도 단지 상징적인 존재였던 일본 천황이 거주하던 고궁도, 현재에는 일본 천황의 존재 그 자체를 위한 것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각종 성에 대한 설명 역시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각종 사찰과 문화재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비롯하여, 각각의 문화유적은 지방의 특색을 드러내거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근대 일본'의 주요 문화유산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문학 역시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상 수상은 일본 문학의 격조 있음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춰져 있는 것 같았다. 이는 아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의 민감한 반응과 아전인수 격 사고의 해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를 달리하고 지역을 달리하며 층위가 다른 이 각각의 유적과 문화들이 '근대 일본'이라는 소실점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생각을 쉽사리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마치 한국의 과거 모든 역사가 한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어 '오늘날 한국'으로 되살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고도들의 문화 유적은 과거의 것이지만 그것들의 의미망은 근대 일본, 오늘날의 일본으로 재해석되어 귀결되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마치 오늘날 일본이 천황과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동지사대학의 윤동주시비 역시도 근대 일본,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말이다.
3.
이러한 생각들은 4일간의 교토 일정을 정리하고 도쿄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이로하 여관에서 짐을 꾸리고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이동했다. 신칸센 고속 열차의 안락함과 빠른 속도에 약간 경탄하며 우리는 가마쿠라 문학관을 경유했다.
그곳은 일본 근대 문인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장소였다. 일본 문학사에 어두운 나로서는 각 문인들에 대해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현지에서 나오신 안내선생님 덕분에 여러 문인들에 관한 짧은 지식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참고로 안내선생님은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신 분인데 능숙한 일본어 사용으로 우리들을 이곳저곳 안내해주셨으며, 그 분 덕분에 일본에서 별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가마쿠라 문학관은 아름다운 정원과 아름다운 건물로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그 곳에서 우리는 일본 근대문학의 성립과 그 주요 활동문인들을 문헌으로나마 접해볼 수 있었다. 이곳 역시도 근대 일본이, 좀더 구체적으로는 근대 일본문학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는가를 말해주는 듯 했다.
우리는 가마쿠라 문학관 이외에, 큰 불상이 있는 가마쿠라 大佛 등을 관람하고,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요코하마를 거치면서 도쿄에 도착하니 비로소 오늘날의 일본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교토, 오사카, 나라 등은 관광문화유적의 도시로 한국 경주의 분위기와 유사해서 오늘날 일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는 힘든 곳이었던 것 같았다. 요코하마와 도쿄는 일본의 중심부답게 서울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도시의 인파와 다소 지저분한 거리, 낡은 건물, 소음, 유흥가 등 서울과 유사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고, 군데군데 눈에 띄는 노숙자의 일행들도 낯설지는 않았다. 그곳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근대 혹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는 듯 했다. 古都에서 미처 보지 못한 일본의 다른 모습, 아니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심이 어떠한지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이방인이자 짧은 여행객에 불과한 나였지만, 전철과 지하철 주변을 서성이는 노숙자와 도시인의 생활 패턴은 서울에서 느끼듯이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도쿄로 숙소를 옮긴 다음 날 우리는 도쿄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설국』의 작품 무대인 에치코 유라와로 신칸센을 타고 이동했다. 이곳은 교토, 오사카, 나라, 도쿄, 요코하마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었다. 1∼2m 가까이 쌓인 눈은 왜 이곳이 『설국』의 무대인지 말해주기에 충분했고, 허리 가까이 쌓인 눈을 밟아보면서 정말로 낯선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국』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긴 터널을 신칸엔으로 통과하자 그곳은 정말로 눈 덮인 낯선 풍격으로 다가왔다.
에치코 유자와의 감흥을 고스란히 가지고 동경으로 되돌아 왔다. 우리는 일정에 맞추어 국내에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라는 소설의 저자로 소개된 바 있는 호시노 도모유카라는 작가와의 간담회를 위해 신주쿠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20층의 호텔 로비에서 내려다본 도심은 현재 일본의 모습을 외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대중적이지 않지만 문단에서 호평을 받는 작가라는 호시노 도모유키와의 간담회는 매우 흥미로웠다. 이방인으로 스쳐지나가는 관광객의 눈으로 일본을 원근감 없이 평면적으로만 살펴보던 나로서는 그와는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고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일본의 기성 세대와 기성 제도 등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본인 특유의 핸섬하고 세련된 마스크를 지닌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근대 자본주의 일본의 비판적 시각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 작가의 시각을 통해 현재 일본의 심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멕시코 유학이력을 알고 있는 나는 멕시코의 사빠띠스따의 투쟁에 관해 물어보았고, 그는 이에 대해 긍정적이고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말하면서 34회 문예상을 수상한 『최후의 한숨』이 사빠띠스따 투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번역되기를 희망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와의 대화는 문학적인 것을 넘어서 한국 내의 붉은 악마와 촛불 시위에 관한 소재로까지 확장해 갔는데 그는 이를 민족주의의 확장으로 보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나는 이에 대해, 그것이 단순히 민족주의적 모습을 가지고 있는 행위가 아니라 네티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주체성의 등장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구호 역시도 과거 단순한 민족주의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이며 촛불시위는 단순한 반미시위를 넘어 반전평화시위와 집회로 확장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2시간 남짓의 간담회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근대 자본주의 일본을 비판하는 일본인을 만나서 그랬는지 다소 흥분하기도 했던 것 같다.
이어 이날 오후 일정에는 일본 메이저 출판사인 집영사의 방문과 한국문학연구자인 안우식 교수와의 간담회가 있었다. 집영사는 고층빌딩 두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큰 규모의 출판사였는데 출판하는 책의 종류는 플레이보이 잡지에서 만화책, 문예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한국문학의 번역작업도 활발한 듯 했다.
집영사 주변에는 헌책방과 큰 규모의 서점이 위치하고 있었다. 헌책방은 여느 서점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깔끔하며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큰 규모의 서점도 잠깐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한국에서는 이미 번역되어져 여러 관심을 불러일으킨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이 번역되어, 안토니오 네그리 기획코너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맑스주의 중에서도 자율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주요 저작이 일본 내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어떤 대안적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그 곳에서 제국 특집을 다루고 있는 『현대사상』이라는 잡지를 한권 구입하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겸하면서 안우식 교수와의 간담회가 이어졌다. 국내에서 『김사량 평전』을 출판하기도 했던 안우식 교수는 우리 일행들에게, 과거 조선유학생의 생활공간과,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이야기 속에는 한국근대문학의 주요 인사들과 중국의 주은래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꽤나 흥미로웠다.
다음 날은 도쿄외국어대학을 방문하여 한국문학 연구자인 사에구사 도사카쓰 교수와의 간담회를 가졌다. 사에구사 도시카쓰 교수님이 함께 대동하고 나온 한국 유학생들, 한국문학 연구자들과의 대화 역시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도쿄외국어대학 도서관을 견학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는데 최신의 설비가 갖추어져 있는 도서관 시설이 자못 부럽기도 했다. 간담회를 마치고 도쿄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도 둘러보았다.
도쿄에 와서 적잖은 인사들과의 만남과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번역 책을 보면서, 그리고 자본주의 질서 흐름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적 시각을 공유하면서,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어서 보람찬 시간들로 기억된다. 근대 자본주의 일본으로 집약되는 지점과, 또 그러한 지점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의식의 공유라는 점에서 물리적 시공간을 넘어 무언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또한 제기되고 있다는 측면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9박 10일간의 일본문학기행은 다음 날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 행 항공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짧은 기간동안의 일본 기행이라는 점에서 심도 있는 문제제기와 문제의식 형성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을 접하면서 느꼈던 문제의식과 감상은 이후의 개인적이고 공통적인 작업을 진행하는데 뜻 깊은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이러한 일본문학기행 기회를 제공해준 대산문화재단과, 우리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도록 도와주신 김효진 선생님과 안내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9박 10일간 같이 여행을 하며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즐거움을 나누었던 대산대학생문학상 수상자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여행의 경험은 향후 글쓰기와 다른 일상의 작업에 소중한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 같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문제의식을 보다 심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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