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유럽, 내 '상징의 숲'
글쓴이 : 박은미
날짜 : 12.03.07|조회 : 7422
언제부터인가 센 강은 내게, 속절없는 청춘과 희망과 절망과 성(聖)과 속(俗) 따위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그 무엇이었다. 작년 여름 국내에서 있었던 브로드웨이 팀의 뮤지컬 공연 「레 미제라블」을 보고 나서, 나는, 자베르의 자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썼었던가. "아…… 자살 직전 '독백soliloquy'을 부를 때의 그 드라마틱하고 긴장감 넘치던 자베르의 노래…… 너무도 표현력이 풍부한 노래여서 자베르의 갈등과 고뇌가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브라보를 외치고 싶었지만, 센 강, 아……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수없이 많은 청춘 남녀의 꿈과 고뇌로 얼룩진, 수없이 많은 예술가들의 아우라가 스며 있는, 그 센 강, 그 강으로 자베르가 뛰어드는 순간에 브라보를 외치는 게 뭐해서 차마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치기 어린 센티멘털리즘이었겠지만, 센 강이라는 말만 들어도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같이 여행했던 일행 중의 누군가가 "그렇게 좋으면 뛰어내리지 그러니?" 하고 말했을 때 난 그만, 그러고 싶다고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내겐 흐르는 센 강을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 있은들 "2월의 센 강은 차갑답니다."라고 말하며 다가올 남자가 없었겠지만. 국내에선 "걸 온 더 브릿지"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영화 「다리 위의 소녀La Fille sur le Pont」에서 센 강에 뛰어들기 위해 다리 위에 서 있던 에델(바네사 파라디)에겐 가보(다니엘 오테유)라는 멋진 남성이 다가온다. 청순하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인 바네사 파라디의 매력에 홀리듯 심취되어 보았던 영화이다. 프랑스에선 원래 센 강의 다리가, 절망에 빠진 미모의 여인과 그 여인을 구원하는 멋진 남자가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인 건지, 아니면 르콩트 감독이 남의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을 자신의 영화 속에 비슷하게 담은 것인지, 흥미롭게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도 아주 흡사한 장면이 나온다. 센 강의 다리 위에 서서 자살을 생각하는 조앙에게 라비크라는 구원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조앙은 1년간 더 유예의 삶을 산다. "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희망이란 또 왜 이렇게 격렬한가"라는 아폴리네르의 시구가 정말 잘 어울릴 법한 '유예'의 삶이었다.
「미라보 다리」에서 아폴리네르가 하릴없이 흘러만 가는 안타까운 세월을 흐르는 센 강에 빗대기도 했지만, 센 강은, 나만의 과장된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냥 강이 아니라 삶 자체를 표상하는 상징화된 강이다. 그것은 에델과 가보에게서처럼 새로운 사랑의 시작에 대한 예징(例徵)이 되기도 하고, 자베르에게서처럼 생명의 수장(水葬)을 의미하는 종말에 대한 표지가 되기도 하며, 조앙에게서처럼 결국은 지리멸렬한 유예밖에 되지 않을 또 다른 생활과 또 다른 사랑을 기대 속에 시작하도록 하는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센 강은 그야말로 다면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과 닮은 데가 있다. 그것에는 절망도, 그리고 그 절망적 삶 속에서도 버릴 수 없는 '격렬한 희망'도, 모두 스며 있는 것이다.
센 강뿐 아니라 15일간의 여행을 통해 본 유럽의 풍경들 모두가 내게는 그 어떤 신비로운 상징이었다. 런던의 지하철역 안에 즐비한 연극 및 뮤지컬 포스터들,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 극장과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로 저녁 늦게까지 붐비는 웨스트엔드, 모딜리아니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 룩상부르 공원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한 블록 안에 몇 개씩 들어서 있는 서점과 음반 매장들이 부러움을 자아냈던, 소르본대학과 파리7대학 앞의 거리들……. 이런 풍경은 내게 서유럽의 문화적 풍요에 대한 상징이었다. 특히 파리7대학 앞의 음반 매장들은 독특한 판매 시스템을 갖고 있었는데, 각 매장들이 장르별로 특성화돼 있어서 클래식 음반만 파는 가게,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만 파는 가게, 록 음반만 파는 가게 등등으로 구분이 돼 있었다. 음반 매장이나 서점은 점점 사라지고 카페 따위만 늘어가는 우리나라의 대학가―다른 데는 잘 모르겠고 내가 다니는 학교 앞의 거리는 그렇다―와 비교하니 부러움을 안 느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유럽에 가면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었던 시디들을 사겠노라고 계획했던 나는, 우리나라에서 개봉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트랙 앨범만은 어이없게도 발매되지 않았던 영화들의 시디를 유럽에서 사왔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오에스티(OST)를 런던 피커딜리(Piccadilly)의 타워레코드에서 사며 나는,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문화가 내용적으로 얼마나 제한돼 있는지, 서유럽이 자기네 문화의 창출과 수출에 선진적이면서도 다른 나라의 문화 역시 얼마나 다양하게 수입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외국의 선진국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종종 배타적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뮤지컬은 뮤지컬의 본고장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에서 환영을 못 받는 식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네 문화에 대해서 보수적일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폭넓게 수입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구입할 수 없었던 프랑스 영화와 유고 영화의 오에스티―두 영화 모두 국내에서 개봉됐다―를 나는 영국에서 샀던 것이다.)
수시로 눈에 띄는 '거리의 악사'들도 유럽은 역시 문화 강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이라고 불쌍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구걸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리의 악사는 인사동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생음악'이 수시로 들리는 유럽의 지하철역이나 거리는 이색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지하철 안에서 마이크를 꺼내 들고 샹송을 부르며 구걸하는 사람을 보았는데, 지하철 안에서 마이크를 써가며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해외 여행이 처음인 내겐 조금은 신기한 진풍경이기도 했거니와, 불우한 가정환경 따위에 대한 호소문을 돌리며 구걸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우리네 지하철의 어두운 풍경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는 부러움 섞인 생각마저 들었다. 사치스러운 감상이라고 누군가 비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거리의 악사들이 수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연주의 내용도 다양해서, 악사들은 비단 가수나 기타리스트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영국의 어느 지하철역에선 어떤 금관악기 소리가 내 귀를 붙들었고(구체적으로 무슨 악기였는지는 멀리서 보았기에 잘 모른다. 난 소리만 듣고도 악기 이름을 알아맞힐 만큼 음악적 조예가 깊지는 않으니까.), 프랑스의 어떤 지하철역에선 연주하기가 꽤 힘든 걸로 알고 있는 트럼펫이 연주되고 있었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마인(Main) 강 위 다리에선 어느 노인이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또 다른 지하철역에선 아예 실내악단처럼 몇 명으로 구성된 연주자들이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이중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눈과 귀를 끊임없이 현혹하는 유럽의 거리와 지하철역들을 다니며 나는 갈수록 도취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도취 속에서는, 생각보다 쌀쌀했던 2월의 유럽 날씨도 '차가움'이 아니라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한시적 관광객이라는 신분으로 본 유럽의 모습엔 당연히 사회 내부의 구조적인 모순 따위가 드러나 있을 수 없다. 짧은 기간 동안의 여행에서 일시적 관광객인 나는 표면화된 인상만을 좇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관광객의 감탄과 선망 어린 시선에 포착된 유럽의 아름다움은 결국 피상적인 아름다움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온사인이 찬란하게 밝혀진 밤의 샹젤리제―정말 화려했다!―를 걸으며 김윤영의 단편 「루이뷔똥」을 연상할 만큼 바보스럽고도 고지식한 이른바 사회 의식이란 것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프랑스에 거주하며 우리나라 희곡 작품을 불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한유미 씨와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나는 한국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인종차별적인 태도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얘기 역시 관광객인 내겐 절실하고도 뼈아픈 공감을 줄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배면에까지 비판적인 성찰의 촉수를 뻗치길 거부하며 표면적인 인상만을 즐기다 보니, 유럽은 아름다운 곳일 거라는 평소의 동경 어린 기대는 아예 견고한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조금 과장을 섞어 표현하자면 입국을 거부당할 뻔했던, 우울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샹젤리제는 하나도 안 멋있고 거지들만 많고 지저분하다더라, 센 강은 똥물이고 한강보다도 안 멋있다더라, 하는 따위의 출국하기 전 들었던 얘기들을 나는 유럽 땅에서, '나한테 그런 허위 정보를 제공하다니'라는 생각과 함께 코웃음치며 비웃었던 것이다.
거리를 지나다니기만 해도 느껴지는 유럽의 아름다움은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풍경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파리의 경우, 샹젤리제의 눈부신 조명, 몽파르나스의 활기, 에펠탑과 퐁피두센터의 인공적인 조형미―퐁피두센터를 본 순간 나는 건물이 공사 중인 줄 알았다!―등이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면, 돌로 된 노면(路面)이나 오래전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역시 돌로 바닥이 돼 있는 거리와 지어진 지 오래된 낮은 건물들과 빨간색 이층 버스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런던의 풍경도 전통이 현대의 삶 속에 조화롭게 스며 있음을 느끼게 했다. 역사의 흔적이 거의 소실돼버린, 남아 있는 전통마저도 현대의 삶과 융화되기는커녕 보존이라는 명분 아래 격리돼버린 듯한 우리나라의 도시 풍경과는 달랐다. 독일의 경우 프랑크푸르트는 12세기에 형성된 구시가(舊市街)라는 뢰머광장 부근을 제외하고는 아주 최근에 지어진 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많았지만, 본은 현대적인 활기도 넘치면서 역사도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쾰른 선제후의 궁전이었다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을 쓰고 있는 본대학이나, 통일되기 전까지 본의 시청이었다던, 역시 바로크 양식의 구시청 건물, 그 바로 옆에 있는 베토벤이 자주 갔다던 식당(지금도 영업한다!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맛도 있으면서 값도 싼 편이라고 본대학 한국학과에서 나오신 선생님들이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역사가 700년이나 됐다는 삼거리장터 등등을 보며 나는, 그 유장한 역사의 무게 앞에 벅찬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의 무너질 듯한 낡은 고성(古城) 앞에 섰을 때나 헤겔, 야스퍼스 등 철학자들이 산책하며 걷던 거리라는 '철학자의 길'을 걸었을 때 받았던 느낌도 비슷했다.
그런데 나는, '철학자의 길'로 이어지는 골목을 올라가며 헉헉댔을 때 어느 중년의 독일 남자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힘내라는 제스처를 보여준 것에 대해 수첩에 뭐라고 끼적대며 적는다. 그렇게 끼적대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사람 살 냄새 느껴지는 이런 풍경들이 나중에도 유럽을 정겹게 떠올리게 하지 않을까."라고 적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런 풍경이 과연 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 하는 의식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그토록 아름답게 보았던 유럽의 모습에는 과장이 섞여 있었던 게 아닐까? 그 과장 속에서 낯선 사람의 힘내라는 제스처까지 필요 이상으로 특별하게 인식했던 건 아닐까?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유럽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방어기제로 작용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사소한 것도 과장해서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의 유럽을 보기보단 내가 채색해서 빚어낸 유럽의 풍경에 스스로 도취했던 건 아닐까? 내가 애초에 센 강에 대한 심미화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같이 여행했던 일행 중의 누구처럼 나 역시도 "센 강 물 정말 더럽네. 한강보다 더 작네." 따위의 불평을 하지 않았을까?
상징은 말 그대로 상징이기에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에는 구체적인 실감과 이로 인한 친밀감 대신 잡히지 않는 추상화된 그 무엇이 숨어 있다. 유럽에서 마주친 강이며 거리의 풍경 따위를 아름다운 상징으로 받아들였던 내겐 애초부터 그 풍경들과 친밀하게 교통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상징은 수직적 초월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비의(秘意)를 숨기고 있기에. 그런데 그 초월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이번 여행은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방문한다는 특성상 주마간산 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스치듯 본 유럽의 풍경은 당연히 친근한 속삭임 대신 신비롭고 압도적인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유럽을 다녀오고 싶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언젠가 김화영 교수가 말한, "한 장소에 여러 날 동안 머물면서 [……] 생소했던 한 도시나 마을의 풍경과 사람과 경험을 내 고향이나 동창생이나 첫 사랑처럼 삶의 구체적인 일부로 만드는"(「거듭 읽는 소설과 거듭 쓰는 소설」, 디지틀조선일보www.chosun.com, 2001. 12. 14.) 여행을 해보고 싶다.
써놓고 보니 '문학' 기행문다운 내용이 아니어서 민망한데, 어쩌겠나, 내겐 도셋 박물관의 토마스 하디 관련 자료들이나 에밀리 브론테의 생가에 전시돼 있던 유품들, 괴테 생가의 서재에 있던 낡은 책, 파리7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공부하는 프랑스 학생들과 나누었던 문학에 대한 시답잖은 대화 따위보단 거리를 다니며 본 풍광과 거기서 받은 인상들이 더 소중한걸……. 아무려나, 나는 유럽을 다녀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사온 시디를 들으며, 또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흐뭇한 감상에 젖는다. 나는 아직도 유럽, 그 아름다운 '상징의 숲'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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